지난주 며칠간 날씨가 맑았다. 미세먼지 체크 어플도 ‘좋음’이었고 북한산의 미끈한 바위벽도 시야에 또렷하게 잡혔다. 하여 주말산행지로 낙점한 곳이 상주 청화산이다. 일요일 새벽, 날씨를 검색했다. 왼종일 ‘흐림’이다. 조망 산행을 기대했는데 날씨가 어긋장이다. 짐작건대 푸르게 빛나는 청화산(靑華山)은 날샌 듯 싶다.

봄은 산꾼들의 복장부터 확 바꿔 놓는다. 두텁고 칙칙하던 복장이 한결 가볍고 산뜻해졌다. 낯익은 산꾼들과 수인사를 건네며 버스에 올랐다.

“봄철 산불 경방기간이라 대부분 산이 5월초까진 출입 통제입니다. 하지만 우린 해당 지자체장으로부터 사전에 탐방허가서를 받았으니 쫄지 말고 호젓하게 산행을 즐기시면 됩니다”

산대장의 안내 멘트에 힘이 실려 있다. 회원들을 위해 철저히 준비했음을 고하는 터라 그럴만도 하다. 이어지는 산대장의 50禁 유머에 미투(Me Too)를 염려하면서도 포복절도를 할 수밖에.

청화산 들머리, 늘재(380m)에 닿았다. 늘재는 한강과 낙동강의 분수령이기도 하다. 비 오는 날, 늘재에 서면 양쪽 어깨로 떨어진 빗방울이 한쪽은 낙동강으로, 또 한쪽은 한강으로 나뉘어 흘러든다 하여 分水嶺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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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재에는 자그마한 성황당과 엄청스레 큰 백두대간 비가 있다. 예로부터 이 고개를 넘나들던 길손들이 무사를 빌던 성황당이다. 그 앞에 무지막지한 돌기둥을 세워 놓았다. 부조화의 표본을 보는 듯 하다.
봄기운 움트는 상주 청화산을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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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표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산길로 들어섰다. 산길 바닥엔 야자매트가 깔려 있어 보행감이 좋다. 언제부턴가 산길에서 자주 맞닥뜨리는 거적(야자매트)이다. 코코넛 열매에서 추출한 동남아산 천연소재다. 자연친화적이며 토사유실 방지에도 도움이 된다하나 너무 남발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정상까진 2.2km, 거리상으로는 만만하다. 표고 차이는 604m, 오름길이 까칠할 것이란 계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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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 시작 20여분 만에 속리산의 주능선이 한 눈에 들어오는 전망터에 닿았다. 재킷을 벗어 배낭에 구겨 넣었다. 셔츠는 그새 땀에 젖어 척척하다. 전망터 한 켠에 정국기원단(靖國祈願壇)이란 비석이 눈에 들어왔다. ‘靖國’이라, ‘나라를 다스려 안정케 한다’란 좋은 뜻이긴 하나 일본 발음으로 ‘야스쿠니(靖國)’다.
태평양전쟁 전범이 안치된 야스쿠니신사에 일본 정치인이 참배하는 과정에서 우리나라를 비롯 주변 피해국의 반발이 끊이질 않는데 왜 하필 이곳에 떠올리고 싶지 않은 그 ‘야스쿠니(靖國)’란 단어가…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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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 쌓인 평평한 산길은 카펫 위를 걷는 기분이나 비탈지거나 너덜지의 낙엽 밑은 가늠할 수 없어 매우 조심스럽다. 산속은 적막했다. 꿈틀대며 대지를 뚫고 오르는 봄기운이 느껴진다. 산불 예방을 위한 통제기간이라 더욱 고요하다. 산 전체를 전세 낸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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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등로 보수를 한듯 로프 걸린 목봉이 말쑥하다. 뭐, 안전 산행을 위한 배려라 지극히 감사하나 꼭 있어야 할 구간엔 없고 굳이 없어도 될 것 같은 곳엔 있어 하는 소리다. 딴지 걸려는 건 아니다. 설치 기준을 잘 몰라서 하는 소리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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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기운 움트는 상주 청화산을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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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 조금 못미쳐 H표시 빈터에 배낭을 내렸다. 사방이 확트인 곳이다. 무딘 톱날처럼 보이는 속리산 능선과 도명산을 비롯 파도처럼 일렁이는 먼 산 능선을 바라보며 자리를 폈다. 챙겨온 누룽지를 온수통에 넣어 불렸다. 간편 행동식으로 이만한 게 없다. 경험으로 득한 노하우다. 따스한 봄볕이 좋아 수다 삼매경에 푹 빠진 몇몇은 두고 코앞 정상을 향해 다시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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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화산 정상은 협소한 바위봉이다. 정상석에 음각된 ‘白頭大幹 靑華山’이 검버섯(?)에 묻혀 있어 가까이 다가서야 글씨를 읽을 수 있다. 청화산은 경북 문경과 상주, 충북 괴산에 걸쳐져 있다. 양지녘 생강나무는 노란 꽃망울을 터트리는데 정상 아래 응달진 북사면은 잔설이 희끗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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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 한 켠에 세워진 이정표가 눈에 들어왔다. 눌재, 청화농원, 조항산 방향을 각각 가리킨다. 근데 뭔가 이상하다. ‘늘재’로 알고 있었는데 이곳 이정표엔 ‘눌재’로 적혀 있다. 더욱 가관인 것은 조항산 갈림길에서 만난 이정표엔 ‘늘티재’로 표기되어 있다. 뿐만이 아니다. 해발고도 표시도 정상석엔 970m, 이정표 기둥엔 984m다. 좋은 산길 걸으며 지적질은 하고 싶지 않은데 자꾸만 오기(誤記)가 눈에 띄니 어쩌겠나. 이 정도면 무신경의 극치 아닌가. 오가는 대간꾼들도 수차 지적했을 터인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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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항산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조항산, 대야산, 장성봉, 희양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길이다. 애초 계획은 조항산을 지나 대야산 갈림길에서 의상저수지로 하산하는 거였다. 그러나 후미 몇몇은 정상에서 곧장 청화농원 방향으로 하산키로 했고 몇몇은 동일 코스로 이동하고 있다는 무전을 받았다. 앞선 일행 셋이 갓바위재 못미쳐 880봉과 884봉 사이 안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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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부터 대간길을 버리고 의상저수지 방향 급사면으로 내려섰다. 산꾼들이 지나다닌 흔적은 찾을 수 없다. 그야말로 신루트 개척이다. 한걸음 뗄 때마다 긴장의 연속이다. 낙엽 아래 감춰진 얼음은 곧 지뢰다. 된비알의 돌멩이는 발끝에 걸리기만 하면 여지없이 굴러 아찔하게 만들었다. 뚜렷한 길을 던진 값을 강도높게 톡톡히 치렀다.
버벅대며 내려선 끝은 의상저수지. 그러나 끝이 아니다. 저수지를 반바퀴 돌아 댐 뒤에 타고 온 버스가 대기하고 있다. 너덜너덜해진 삭신을 추스려 다시 걸음을 뗀다.




파김치가 된 소생이 측은해 보였던지, 저수지에 어린 청화산 그림자가 저수지를 돌아 걷는 내내 쓰담쓰담하며 길동무를 해주었다.

늘재>전망대>H공터(점심)>청화산 정상>858봉>…여기서부터 길을 놓쳐 가파른 산비탈>계곡>의상저수지로 어렵게 하산 완료(총 8.9k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