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귀와 나는 / 김광렬

당나귀와 나는 같다
늙어 게슴츠레해질 눈과 눈곱과
몽당빗자루 같은 꼬리와

등에 잔뜩 인생을 짊어지고
힘겹게 걸어가는 모습과
절뚝거리는 마음과

무엇인가 하소연하는 듯
주인을 바라보는 눈초리와
깊은 체념과 젖어 있는 쓸쓸한 희망과


오래된 시집들을 뒤적이다가 반가운 얼굴을 만났습니다. 김광렬 시인. 같은 나이에 같은 대학을 다녔고 한 하숙촌 엎어지면 코 닿는 집에서 살았지만 학번이 1년 빠르면서 과가 달라 평소 왕래하던 사이는 아니었습니다. 성품이 겸손하면서도 조용한 문학 청년이었지요. 어쩌다 얼굴을 대하면 슬몃 미소 지으며 지나치곤 했습니다. 정확한 연도는 기억 안 나지만 대학을 막 졸업한 그가 무거운 가방을 들고 하숙촌 골목에서 나와 마주친 게 마지막 대면이었습니다. 지방 어느 곳에 취직이 됐으며 일단 낙향하려고 떠나는 중이었다지요.

30년도 더 지난 과거사인데 그 만남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물론 이후로도 연락을 하거나 만난 적은 없지만 그의 고향 제주도 얘기만 나오면 항상 떠오릅니다. 현재 제주시 어느 여학교의 선생님으로 재직 중이며 세 권의 시집을 낸 것으로 전해지는 시인은 어쩌면 나를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요. 자연스런 해후가 언제고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타인을 만나 사랑하고 이별하고 그리워하는 건 지극히 평범한 일이지만 이처럼 인간의 진한 향기가 오래 느껴지는 경우는 드문 듯하네요.


1 월 에 / 김광렬

이부자리가 싸늘터니
어 이것 봐라
간밤새 눈이 내렸다

올해 들어 처음 내리는 눈
사박사박
세상이 빛나고
다가서는 한라산의 서늘한 이마

아이들은 창가에서
일제히 환호성을 터트리고
모두들 그동안
아무래도 겨울답지 않았었나 보다

서둘러 집을 나서는 사람들
조심조심 조금은 여유 있게
미끄럼 타며 즐거워하고

아 나도 어서 빨리
저 눈발 속으로 나서야지
아이들처럼 풋풋한 마음으로

서정은 나무 위에
하늘을 간간이 날아오르는 뭇새들 속에
깜짝깜짝 놀라며 피어나고

먼저 누구를 만날까
이 아침 언뜻 만날 사람 떠오르지 않고
그래 우선 찻집에 들러
따스한 차 한잔 들이켠 후

버스를 타리라
서귀포로 향하는 버스
가다 성판악 그 어디쯤 내려
울울창창 늘어선 나무들

그 속을 무작정 거닐다가
아 불현듯 나도 그만
한 그루 나무가 되어버려서

눈을 맞으리라
무수히 무수히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리라
순수의 눈물도 몇 방울
나무 위에 걸어놓고 오리라

- 김광렬 시집『가을의 詩』(창비시선 98, 1991)


지난 1975년 일 년 간 둥지를 틀었던 제주 생활이 새삼 떠오릅니다. 당시 제주의 명동이었던 칠성통의 독일빵집과 아리랑극장 그리고 심지다방, 제주항이 내려다보이는 사라봉과 별두봉, 5․16도로를 넘어가는 서귀포 행 마이크로 버스, 협재 바닷가의 하얀 사장, 시골 할머니들의 100% 이해 불가 사투리, 서부두와 산지 골목의 끈적끈적한 밤, 검은 밤바다 파도와 함께 젖었던 달달했던 막걸리가 그립습니다. 최근 여행을 다녀온 김선미 시인의 ‘한라산 설경’, ‘서귀포’ 연작 사진을 보면서 잠시 그때로 되돌아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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