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닷컴 글방에 [윤코치의 인생 신공]이라는 이름으로 새 칼럼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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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숲으로 간 것은 신중하기 살기 위해서, 삶의 본질만을 마주하기 위해서, 삶의 가르침을 과연 내가 배울 수 있을지 알기 위해서, 그리고 죽을 때가 되어 내가 제대로 살지 못했음을 깨닫게 되지 않기 위해서였다. – 헨리 데이비드 소로
[윤영돈 칼럼] 제대로 살고 싶다면 스스로 유배시켜라
◆ 산다는 것은 공부다

‘내가 제대로 살고 있는가?’ 죽을 때가 되어 내가 제대로 살지 못했음을 깨닫는 것만큼 비참한 상황은 없을 것이다. ‘당신은 죽을 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원하는가?’ 피터 드러커의 위대한 질문처럼 자신의 미래상을 그려봐야 한다. 20년간 옥고를 치른 신영복 선생은 “그 시간, 자신을 견디게 해준 것은 한 겨울, 독방의 작은 창으로 들어오던 겨우 신문지 크기만한 햇볕이었다”고 고백한다. 한학자 이구영 선생에게 한학을, 서예가 조병호 선생에게 글씨를 배우고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쓴다. 필자는 2008년 인사동에서 한국경제신문 주최로 ‘저자와의 만찬’이라는 모임에서 신영복 선생을 직접 뵌 일이 있다. “인생의 일관된 것이 있다면 부단히 자신을 변화시켜야겠다는 기본적인 사색이다. 산다는 것은 공부다. 계속 공부하고 깨닫는 것이다. 감옥에서의 시절이 대학 생활이라고 할 만큼 많은 것을 배웠다”고 한다. ‘부단히 자신을 변화시켜야겠다’는 사색공부를 시작하자.

◆ 끊임없는 자기성찰을 위해서 스스로 유배시켜라

위대한 작가들은 자기의 절대고독을 글쓰기로 승화시켰다. 작가가 아니더라도 책상에 가두지 않으면 결코 좋은 글을 쓸 수 없다.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겨야 한다. 글쓰기를 통해 자신과 타인의 삶에 대한 능동적인 관심을 갖게 되었다. 사색은 ‘유배라는 행위’에서 나온다. 소설가 한승원은 자기를 스스로 유배시키고 가두라고 조언한다. “어떤 글이든지 그것을 쓰기 위해서 나는 철저하게 나를 서재 속에 가둔다”고 말한다. 끊임없는 자기성찰이 없으면 간결한 문장이 나오기 어렵다. 세계적 작가 세르반테스는 레판토 해전에 참전했다가 가슴과 왼손에 총상을 입었고, 그 후유증으로 평생 왼손을 쓰지 못하고 ‘레판토의 외팔이’라는 별명을 얻었지만 세비야에서 감옥에서 소설 [돈키호테]를 구상한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버트런드 러셀은 감옥에서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하루 4시간의 철학 독서, 4시간의 일반 독서, 그리고 4시간의 집필로 짜여 있었다. 결국 형무소에서 [수학 철학 입문]을 썼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18년간 유배지에서 호롱불 아래 복숭아뼈에 세 번이나 구멍이 났다는 일화가 전해질 정도로 글쓰기에 몰입해 500여권 책을 쓰고 제자를 길러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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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나이가 많다고 직급이 높다고 재력이 높다고 다른 사람을 함부로 대하는 사람을 만납니다. 늘 많은 사람들로 둘러쌓여 있던 그 사람은 어느 순간 기력이 빠지고 직급이 없어지고 할 일이 없어질 쯤에 뵈면 참 초라한 모습일 경우가 있습니다. 진정한 관계는 자신이 다른 사람과 의존하지 않는 독립된 개체였을 때 가능합니다. 관계는 수용성도 중요하지만 독립성을 확보하시기 바랍니다. 제대로 살고 싶으시다면 스스로를 유배시켜서 독립성을 확보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