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 스미스의 <국부론>,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처럼 누구나 제목을 알고 있지만, 현학적 깊이와 방대한 내용에 질려 감히 읽지 못하는 고전들이 있습니다. 인류사에서 큰 획을 긋는 위대한 저서들임에도 현대인들의 관심에서 멀어진 책들이지요.

토머스 로버트 맬서스의 <인구론>도 바로 그런 책입니다. 독특한 경제 이론으로 인류의 미래를 비극적으로 전망한 괴짜 경제학자 맬서스는 <인구론>에서 세계를 아름답게 바꾸려는 모든 시도를 헛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맬서스는 <인구론>에서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하는데 비해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그에 따라 인구의 증가가 인류의 가장 큰 위험을 초래하는 원인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전쟁, 전염병, 기근 등은 사라져야 할 것들이 아니라 인구의 증가를 억제해 주는 훌륭한 요소라고 말합니다. 오히려 전쟁을 막기 위한 노력, 전염병을 퇴치하기 위한 노력 등 인류의 불행한 면을 개선하려는 시도가 인구의 증가를 가속시켜 더 큰 위험을 초래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또한 그런 노력들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하며 결국엔 인구의 증가를 막지 못해 불행한 미래가 펼쳐질 것이라고 단언했습니다.

현대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맬서스의 주장은 일견 놀라운 혜안으로 보입니다. 그의 말처럼 인구의 증가로 인해 지구가 불안해지기 시작한 것은 사실입니다. 산업이 발달하고, 에너지를 소모하는 양이 대단해진 지금, 각각의 개인이 뿜어내는 에너지의 과잉이 환경 문제를 초래해 지구의 수명을 단축시키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과학자들은 인간들이 뿜어내는 과잉 에너지를 재처리하기 위해서는 지구가 세 개는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그의 주장이 명백히 틀린 점도 있습니다. 인구의 증가로 인한 식량 부족 때문에 아직까진 지구가 위험해 보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물론 식량이 풍족한 한국과 달리 아프리카 어느 나라의 어린이는 굶어서 죽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는 식량의 부족 때문이라기보다 제대로 된 분배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이런 부분을 계급의 문제로 보고, 분배를 공평하게 이룬다는 목표 아래 혁명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사회주의 혁명이 실패로 돌아간 지금, 민주주의 국가의 시민 사회에서는 국가 차원에서가 아니라 시민 단위에서 소외된 계층을 위한 나눔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맬서스는 그런 활동을 동정심에서 비롯된 사회악이라고까지 표현했지요. 그런데 맬서스는 인간의 본성을 간과한 것 같습니다. 동정심은 싸구려 심성이 아니라 세상을 밝게 만들고, 서로의 관계를 끈끈하게 이어주는 값비싼 심성이기 때문입니다.



신발 한 짝

인도의 어느 기차역에서 기차가 막 출발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서둘러 기차에 올라 자리를 잡았지요. 기차가 서서히 움직이고 있을 때 한 청년이 허겁지겁 기차에 올라타려고 했습니다. 기차 안의 승객들이 그 청년을 보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어서 뛰어요. 어서 올라타요!”
청년이 그 소리에 힘을 얻었는지 점점 더 빨리 움직이는 기차에 아슬아슬하게 올라탔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청년이 신고 있던 신발 한 짝이 툭 기차 밖으로 떨어졌습니다. 그 당시 인도에는 맨발로 다니는 가난한 사람들도 많았고, 신발은 아주 귀한 물건이었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발을 동동 굴리며 청년보다 더 안타까워했습니다.
“아이고, 신발을 잃어 버렸네.”
“기차를 멈출 수도 없고, 신발 아까워서 어쩌나?”
그때 청년이 신고 있던 나머지 신발 한 짝을 벗더니 기차 밖으로 휙 던졌습니다. 힘차게 던진 한 짝은 먼저 떨어져 있던 한 짝 곁으로 툭 떨어졌습니다. 사람들이 깜짝 놀란 눈으로 청년에게 물었습니다.
“아니, 그 귀한 신발 한 짝을 왜 버리시오?”
“신발 한 짝은 제게 소용없는 물건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버린 것이지요.”
“그렇다고 밖으로 버릴 것까진 없지 않소?”
“아까 떨어뜨린 신발 한 짝을 누군가 줍는다면 그 역시 소용없는 한 짝일 겁니다. 하지만 제가 한 짝마저 버렸으니 이제 누군가는 제대로 된 신발 두 짝을 신을 수 있을 겁니다.”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 청년을 우러러 보았습니다. 그 청년이 바로 마하트마 간디입니다.

베풀고 기부하는 이들로 인해 소외된 계층은 희망을 찾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나눔의 정신을 너무 거창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됩니다. 나눔의 밑바탕이 되는 정서는 ‘측은지심’입니다. 이 측은지심으로 사람들을 대하다 보면 직장에서도, 가족끼리도 관계가 더 풍성해집니다. 측은지심은 여성성이 강한 사람들의 전유물로 마초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섬세한 마음입니다.

측은지심을 가지고 직장 동료를 대하다 보면 그를 단순한 경쟁자나 적으로 대하지 않게 됩니다. 동료의 고민을 들어주게 되고, 동료가 곤란한 상황에 처했을 때 도움의 손길을 주저하지 않고 뻗을 수 있게 됩니다. 상사나 부하 직원에게도 똑같은 풍경이 벌어지겠지요? 이런 도움과 나눔을 받은 상대는 결정적으로 내가 어려운 상황에 빠졌을 때 그 보답을 하곤 합니다. 반대로 측은지심이 없는 관계는 늘 대치 국면입니다. 비무장지대에서 남과 북의 병사들이 서로 총을 겨누고 있는 것처럼 긴장 관계가 지속됩니다.

팀원들끼리 함께 고생한 프로젝트가 큰 성과를 내어 팀원들에게 보상이 내려올 때가 있습니다. 그런 순간, 어떤 상사는 자신의 몫을 적게 가져가고, 팀원들에게 그 보상을 아까워하지 않고 나누어 줍니다. 반대의 경우엔 어떨까요? 팀원들은 모른 척할 뿐 그런 모습을 기억합니다.
‘L부장은 욕심 많고 인색해.’
‘L부장은 자기 챙길 줄만 알지.’
평판이 두려워 나눔을 실천하는 것보다 스스로 행복해지기 위해 나눔을 실천하는 것이 좋습니다. 나눔은 물질에 국한 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부분도 포함하는 것입니다. 따뜻한 위로, 어려움을 함께 보내 주는 시간, 든든한 지원이 모두 나눔이랍니다.
Ⓒ JUNG JIN HO

정진호 IGM 세계경영연구원 이사, <일개미의 반란> 저자










※ 이 칼럼의 연재글은 2013년 1월 8일 신간 <왜 그렇게 살았을까>에서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