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김새가 '예쁘다'거나 '밉다'는 판단은 매우 주관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하다보니 같은 대상이라 하더라도 바라보는 사람의 견해에 따라 美와 醜는 극명하게 엇갈립니다.
우리가 흔히들 얘기하는 호박에 대한 판단이 그 좋은 예가 아닐까 싶습니다.

예쁘지 않은 여인을 가리켜 호박꽃에 비유하는 부정적인 시각은 거의 일반화된 사실입니다.
하지만 호박이 넝쿨째 굴러 들어왔다고 말할 경우의 호박은 예기치 않은 행운이나 횡재를 뜻합니다. 호박은 이처럼 영욕(榮辱)의 상반된 의미를 동시에 지니고 있는 우리와 아주 친근한 작물입니다.

이른 봄 햇볕이 잘 드는 별 쓸모 없는 땅 한켠을 두어 자쯤 파고 두엄 한 삽을 붓고 호박씨 너덧 개를 넣고 흙을 덮은 후 꽃샘추위로 인한 냉해를 방지하는 짚이나 비닐 덮개를 씌우고 착근할 때까지 보살펴주면 그만입니다.
별다른 손길이 가지 않아도 절로 싹이 나고 잎을 틔우고 줄기가 돋아나 암수 꽃을 피우고 벌 나비가 날아와 암꽃에 숫꽃의 꽃가루를 묻혀주면 앙증맞은 새끼호박 열매는 비로소 생장을 시작합니다.
수정이 된 호박열매는 햇빛과 토양에서 빨아들이는 수분과 영양을 공급받아 하루가 다르게 오동통 살이 오릅니다.

밭둑가의 풀숲이나 마당 한켠에 심어놓은 호박넝쿨에 애호박이 주렁주렁 달립니다.
반갑고 고마운 마음으로 애호박을 뚝 따면 금세 열매를 따낸 자욱엔 수액이 몽실몽실 방울을 만들지요. 애호박은 된장찌개로 호박나물로 호박전으로 조리되어 우리의 밥상에 오릅니다.
새우젓으로 간을 맞춘 호박나물은 여름밥상에 빠지지 않는 단골 메뉴지요.

줄기 끝 부분의 여린 호박잎을 따서 줄기의 껍질을 벗겨내고 밥물이 넘쳐오른 밥솥이나 찜기에 살짝 쪄낸 호박잎쌈은 여름 한철에만 맛 볼 수 있는 토속적인 우리의 음식입니다.
호박잎쌈은 집간장에 청홍의 풋고추와 파마늘 다져넣고 고춧가루와 깨소금 참기름으로 버무린 양념장이나 갖은 채소 잘게 썰어넣고 바글바글 끓여낸 강된장이면 훌륭한 궁합입니다.
따뜻한 밥 한숫갈을 부드러운 호박잎 위에 얹고 양념장이나 강된장 조금 얹어 입에 넣고 오물거리면, 아! 그 향기롭고 맛깔스런 토속의 맛이라니......
저는 수 많은 쌈채 중에서도 호박잎을 단연 으뜸으로 칩니다.
그것은 행복한 유년의 기억에 남아 있는 어머니의 손맛 때문일 것입니다.

맛난 호박잎쌈을 마련해주시던 어머니는 이제 구순을 바라보는 연치에 다달아서 치아도 그 수명이 다해버려 저작이 어렵게 되었습니다.
호박구덩이를 마련해주시던 아버지도 기력이 쇠잔해 지팡이에 노구를 의지하셔야 보행이 가능한 처지입니다. 늙음은 소멸에 다가가는 것입니다.
출생은 축복이지만 죽음은 서럽고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래도 이 세상의 같은 하늘 끝자락 남녘땅의 한 공간에서 아직 살아 숨 쉬는 부모님이 계시다는 사실이 저를 크게 위로합니다.

단호박을 사서 어머니가 좋아하시던 호박죽을 끓여봅니다.
샛노란 빛깔이 어릴 적 무쇠솥에서 보글보글 끓던 호박범벅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냅니다.
찹쌀가루를 마련하고 팥을 삶아 끓고 있는 호박냄비 속에 집어넣으면서 제가 살아 있다는 사실에 감사드리게 됩니다.
'괜찮다, 그래도 괜찮다.'
부모님이 제게 주시는 절대사랑은, 제 앞에 놓여지는 현실이  버거울지라도 그것과 맞닥드려 대응할 수 있는 강력한 힘을 주십니다.

단호박으로 만든 호박죽은 늦가을 분이 하얗게 난 청둥 호박으로 만든 것 보다는 소화흡수력이 떨어집니다. 아마 오랜 시간을 두고 서서히 숙성된 작물과 단 시간에 생육된 작물과는 육질과 맛에 차이가 나기 마련인 모양입니다. 단호박 삶아 으깬 재료를 엿기름물과 혼합하여 한 번 더 끓이시면 빛깔 고운 단호박식혜가 만들어집니다. 찹쌀가루 넣지 말고 음료로 만들어 냉장해 드시면, 맛 좋고 조리법 간단하고 소화력도 높아지니 일석삼조입니다.
청둥호박으로 만들 수 있는 음식으로는 물호박떡, 호박고지, 호박잼, 호박범벅이 있지요.
호박, 생각할수록 우리에게 유익하고 고마운 식재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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