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을 대접하면서 창업하라고 해라
창업, 기업을 대접하면서 창업하라고 해라
왜 우리 사회는 기업을 싫어하면서 창의적 기업가 정신을 가진 사람을 아쉬워할까?



국민들의 반기업 정서가 더 확산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해외와 비교해도 우리나라의 반기업 정서가 훨씬 높은 편이다. 최근 2년 사이 국내의 기업호감도는 오히려 더 떨어지는 추세다. 대한상공회의소는 현대경제연구원과 함께 2011년 말 전국 20세 이상 성인 남녀 2000여명을 대상으로 `기업호감지수(CFI)`를 조사한 결과, 100점 만점에 51.2점을 기록했다고 2일 밝혔다. 2011년 상반기(50.8점)보다는 소폭 상승했지만, 기업에 대한 호감도는 지난 2010년보다 더 떨어졌다. 2009년 하반기(53.8점)를 시작으로 2010년 상반기(54점), 2010년 하반기(51.5점)까지 하향 추세가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 강석구 대한상의 기업정책팀장은 “최근 대외경제가 악화되다 보니, 국민들이 느끼는 체감경기가 기업정서에 반영됐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해외와 비교해도 우리나라 국민의 기업호감도는 상당히 낮은 수준이다. 지난 2001년 컨설팅업체 엑센추어가 전 세계 22개국 880개 기업 최고경영자(CEO)를 대상으로 기업인에 대한 자국 국민의 부정적인 인식도를 조사한 결과, 우리나라가 70%의 응답률로 1위를 기록했다. 당시 조사에서 대만(18%), 캐나다(20%), 미국(23%), 싱가포르(28%) 등의 국가는 기업인에 대한 호감도가 우리나라보다 앞도적으로 높았다. 강 팀장은 “60·70년대 산업화 시대에 국내 기업들이 성장하면서 부정적인 이미지가 있었는데, 여전히 그런 인식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데일리, 2012. 2.12)



스티브잡스가 유명을 달리하자 온 지구가 떠들썩하였다. 그는 참으로 많은 일을 하였다. 애플컴퓨터를 만들었고, 픽사라는 영화사를 만들어 토이스토리라는 영화로 아카데미상을 받았는 가하면, iPod을 만들어 음악계를 한 순간에 평정했는 가하면, iPhone을 만들어 통신업계의 생태계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도 한참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의 이른 죽음을 아쉬워하는 추모열기가 미국은 물론 지구촌 곳곳에서 이어지고 있다. 인류의 역사에서 한 기업인의 죽음이 이처럼 많은 사람이 애도한 적은 없었다. 그 것은 단순히 그가 세운 애플이라는 거대한 회사때문만은 아니다. 그의 행적을 돌아보면서 한국에서는 ‘왜 우리는 그와 같은 사람이 나오지 않는 것일까?’라는 의문이 나오고 있다. 그러면서 분석한 이유 중의 하나로 꼽는 것이 기업가에 대한 좋지 않은 편견도 있다.



이와 대조해서 내가 아쉬워하는 사람이 심형래이다. 그는 라스트갓파더, 디워등을 자체적으로 개발한 컴퓨터그래픽 기술을 이용하여 만들었다. 그의 기술력은 이미 국내외에서 상당히 인정을 받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성가는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였다. 영화 자체의 완성도는 주관적인 판단에 따라야 하겠지만, 단지 그가 만들었다는 것만으로 폄하된 점이 많다. 그가 어려워지자 그의 어려움에 대한 고소함섞인 비난을 보면서 한국에서 남들이 하지 않는 것을 개발하여 남보다 앞서가는 기업을 하는 것이 저리도 어렵다는 체감하였다. 왜 그가 그런 수모를 당해야 할까? 그러면서 그는 한 순간 세상의 모든 모순을 지닌 인물로 매스미디어를 채웠다. 스티브 잡슨는 성공했기 때문에 저런 평가를 받는 것이고, 심형래는 그렇지 못해서 일까? 모든 문제를 떠나서 그가 이루어 놓은 컴퓨터그래픽과 그 기술의 실용화에 대한 평가는 제대로 해주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가 정말 스티브잡스처럼 ‘토이스토리’같은 대 성공을 이루었다고 하여도 그에 합당한 평가를 받을까?



요즘 한국에서 일어나는 모든 경제적인 문제는 모두가 기업탓으로 돌려지고 있다. 특히 대기업이 단단히 매를 맞고 있다. 그리고 다수의 사람들은 그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 생각의 근저에는 그동안 기업이 특혜를 받아 성장했고, 그에 대한 응분의 보은을 사회에 해야한다고 바탕이 깔려있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과연 기업이 정부의 특혜만으로 성장을 했을까? 거기에는 기업가의 불굴의 정신도 분명히 있었음은 무시할 수가 없다. 게다가 최근 벌어지는 복지에 들어가는 비용부담의 문제, 양극화의 문제를 기업 그 자체가 일으킨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책임은 기업에 쏠려있다. 사실 이러한 문제는 기업 자체의 문제라기 보다는 사회적인 문제이다. 복지비용은 정부의 정책에 따라 세금의 증감과 적절한 분배로 해결할 문제이다. 기업 양극화의 문제는 대기업의 과대한 영향력도 문제이지만, 세계화된 경쟁의 구조에서 끊임없이 거대한 자본을 퍼붓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없는 환경도 문제이다. 그러고도 생존을 보장하지 못한다. 대표적인 예로 노키아, 소니, 파나소닉, 코닥등 수많은 사례가 있다. 따라서 이런 문제는 국회, 정부, 언론 그리고 시민단체가 협의하고 책임을 나눠야 할 사항이다.



그런데도 요즘 한국의 기업들에 대한 비난이 거세지고 있다. 왜 그럴까? 그 것은 단지 기업이 잘못했기만이 아니라, 기업에 대한 요구가 더 커져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정부에서 기업에 대한 명령을 하고, 지원을 있었지만 사회가 복잡해지고 경제 규모가 커지면서 정부의 역할을 상당부분에서 축소되는 대신에 기업의 자율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실제로 기업의 권력이 이전보다 더 높아졌기 때문에, 사회에서 기업에 더 많은 책임을 요구하고 있다. 특히 이런 문제는 정치인의 중심인 국회의 책임이 크다. 그런데 그들은 정치논리에 몰입되어 사회적 문제적 해결을 보려고 한다. 왜 그럴까? 내가 보기에 기업은 너무나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김승욱등이 쓴 ‘시장인가 정부인가?’에서 그 이유를 잘 설명하였다. 정치논리는 ‘누구에게 얼마를’이라는 식의 자원 배분의 논리로서 주로 분배측면을 중시한다. 반면 경제논리는 효율성, 혹은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얻고자 하는 경제 원칙에 입각한 자원 배분의 논리이다. 그런데 정치인이 염두에 두는 공평성이란 정책 실시에 따른 효과의 공평성이 아닌 분배의 공평성을 의미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즉 정책에 투입되는 자원이 얼마나 주민들에게 골고루 돌아가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정책 결과로 나타나는 혜택이 공평한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게다가 기업은 정치, 종교나 언론분야와는 달리 너무나 효율적이어서 사회적 비난에 대한 반응이 바로 나타난다. 예를 들면 국회의 폭력사태는 이미 수십년째 반복되고 있지만 여전하고, 공무원들의 임의적인 권한행사 역시 지속되고 있으며, 언론의 일단 터트리고 보자는 식의 오보기사는 점점 심해지고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들에게 항의를 잘 하지 않는다. ‘그래봐야 뭘 고쳐! 이미 오래전부터 그래왔고, 앞으로도 고쳐질 가망이 별로 없는 데’라며 포기한다. 하지만 기업은 사회에서 뭔가를 항의하면 바로 ‘잘못했습니다. 시정하겠습니다’하며 고쳐진 결과를 보여준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욱 재미있어 한다. 재미란 디지털 소비자의 관심을 이끄는 가장 핵심적인 요소이다. 정치나 행정에 대한 항의는 결과를 바로 끌어낼 수있을 만큼 효율적이지 못하다. 그러나 기업에 대한 항의는 매출의 감소를 두려워하는 기업의 대응책을 바로 끌어낼 수 있다. 정치와 행정으로서는 도저히 끌어낼 수 없는 그 효율성과 즉각적인 대응에 항의의 주체는 재미를 통한 관심을 만들어 낼 수있다. 결국에는 정부에 요구해야할 사회적인 사항까지도 기업에 요구하고 있다. 그런데 이전의 항의운동에는 소비자 단체가 되든, 시민단체든 분명한 주체가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인터넷이 주체가 될 수 있다. 인터넷이 요구하는 것은 ‘토론의 장’만 펼쳐져 있으면 된다. 트위터를 보면 모든 사람이 모든 사람을 향하여 소리치고 있다. 하지만 그 안에는 맞는 정보와 틀린 정보가 섞여서 무엇이 진실인지 조차도 구분이 되지 않고 있다. 이처럼 인터넷이란 아무의 소유도 아니지만, 모두가 참여하여 자신의 의견을 마음껏 이야기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이든, 아니든 증거가 없어도 얼마든지 정보를 유포하거나, 이미 유포된 정보에 대하여 네티즌의 개인적인 주관대로 마음껏 평가를 할 수있다. 문제는 이러한 인터넷상의 정보는 그 파급력에 비하여 매우 단편적이고, 신뢰도에 대한 가치가 매우 낮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연못에 있는 개구리한테 던지는 돌이 개구리의 생명을 앗아가듯이, 인터넷에 떠도는 어느 소문에 뜻하기 않게 봉변을 당하는 사례를 우리는 개인적인 측면에서나, 기업의 측면에서 수없이 보아왔다. 특히 최근들어 이전 같으면 그냥 넘어갈 수 있는 문제도 인터넷을 통하여 항의를 하고있다. 그리고 실질적으로는 보이지 않는 대중 -시민, 국민, 소비자-을 절대시하는 경향이 늘었다. 기업으로서는 이들의 심기를 건드려서는 절대 않된다. 보이지 않지만, 수시로 항의의 주체가 될 수 있는 속성을 가진, 그러면서도 기업의 존재 기반이 되는 무서운 존재이다. 그래서 최근에는 ‘고객 지향적 기업’이라는 말이 많이 나오고 있다. 고객 중심이라는 말은 기업으로서 당연히 해야할 일이지만, 항의를 할 때도 가장 자주 쓰이는 말이다. 기업이 가장 자주 듣는 말도 ‘고객 무시’라는 말이다. 그리고 그 말은 바로 기업에 대한 매우 강력한 폭력으로 돌아온다. 네트워크화된 사회에서 정치가, 시민단체 그리고 소비자의 무차별적 공격성이야말로 현대의 기업이 가장 무서워하는 존재일 것이다. 이제 기업들은 이를 대단히 중요한 위협의 하나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이에 대비하기 시작하였다. 그 방법 중의 하나로 꾸준히 자사의 도덕적 경영을 알리면서, 선의의 사회적 윤리 준수자임을 표방하고 있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 완수와 최대 이윤의 달성 사이의 논란에도 불구하고, 사회에는 기업에 점점 더 많은 책임을 부과하고 있으며, 기업은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고객 지향, 기업의 사회적 책임, 도덕 마케팅, 기업시민, 기업 메세나, NGO와 파트너 십, 지역사회 공헌…….’ 실행수단과 단어는 다르지만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는 하나이다. “우리 회사는 좋은 회사에요. 돌던지지 말아주세요! 제발!!”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기업에 대한 인식은 점점 나빠져 가고 있다. 그런데도 한국에서 사업을 하는 사업가들은 오히려 늘어나고 있다. 사회적으로도 기업가 정신을 가진 창업자가 더 늘어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이 커다란 회사를 키워서 보다 많은 고용을 하고, 보다 많은 부를 사람들에게 나눠주기를 희망한다. 그게 가능할까? 기업은 나쁘다고 하면서, 기업가들에게 거는 기대는 커져가는 이런 모순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정책을 수립하는 사람이나, 정치를 하는 사람이나, 시민운동을 하는 사람치고 기업가를 제대로 대접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선거때만되면 기업때리기에 몰두를 한다. 과연 그들만이 온 세상의 모든 비리를 짊어지고 있는 것일까? 그런 비리 때문에 정권이 바뀌면 커다란 회사 한두개는 속절없이 무너져야 하는 것일까? 시속 100킬로로 달리면서 5킬로, 10킬로로 달리는 사람들이 기업의 발목을 잡고 있는 상황에서 더 많은 사회적 기업가가 훌륭하게 기업을 키워야 한다는 말이 맞기는 하는 걸까?



창의적 기업가를 아쉬워한다면 기업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와 심정적 지원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