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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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수준의 상식과 임기응변이 가능한 인공지능이 언제쯤 출연할까? 미래학자들은 2040년 전후라고 확신하지만, 또 어떤 이들은 그런 날은 절대 오지 않는다고 한다. 나는 후자에 한 표를 더 행사하고 싶은데, 그 이유는 인간의 고유한 특성인 ‘컨텍스트(context)’라는 허들을 인공지능이 뛰어넘어야 하는데 그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부모가 아이에게 “공부해라”고 하는 이 말은 ‘텍스트(text)’다. ‘이 말을 어떤 상황에서 했는가’는 이 말을 평가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낮에 했다면 당연한 말이 되겠지만 새벽 2시에 했다면 의미가 달라진다. ‘혹독한 부모’라는 평가가 나올 수 있다. 새벽 2시라고 하는 상황이 바로 ‘컨텍스트’다. 물론 컨텍스트는 그런 시간적 상황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말과 글이 나오게 된 모든 상황과 환경을 일컫는다. “공부해라”라는 텍스트는 인공지능에게는 쉬운 일이지만 단어와 단어의 맥락, 문장과 문장의 문맥과 의미를 이해하는 일은 인공지능에게는 무척 어려운 일이다.

인간은 부분을 부분으로만 보지 않고 전체의 일부로 바라본다. 전체에 위치한 부분의 컨텍스트로 문장과 대상을 이해하고 파악한다. 해석수준이론에 따르면 이를 ‘고차원해석’이라고 하는데, 바람직함과 이상적 혜택을 중시한다. 부분보다 전체적 맥락을 이해하려 하므로 추상적 사고에 가까우며, 상대적으로 ‘넓은 사고’에 해당한다. 반대의 개념인 ‘저차원해석’은 뭐든 세세하게 따지며 보기 때문에 구체적 사고의 경향을 띤다. 쉽게 말해 ‘좁은 사고’라고 할 수 있다. 두 개념을 광학기기에 비유하면 저차원해석은 현미경에, 고차원해석은 망원경에 가깝다.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문제나 사물을 인공지능의 우수한 특성처럼 저차원해석 방식으로 대한다는 거다. 당장 눈앞의 손익이 아른거리다보니 투입 시간과 노력, 돈 등을 따지며 ‘이걸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늘 재기만 한다. 컨텍스트를 보지 못하고 당장의 현실에만 눈을 돌려 모든 걸 텍스트 수준으로 보기 때문에 모든 게 기존 것의 답습에 그친다. 늘 해 오던, 편안하고 익숙한 것만 계속 찾게 된다. 당연히 제품이나 디자인, 기술에 대한 혁신적이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기대하긴 힘들다. 설사 변화가 일어났다 해도 기존 것에 대한 단순 가감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중국 전국시대의 사상가였던 순자의 《해폐》편에 이런 말이 나온다. ‘사물의 한 면에 사로잡혀 전체를 파악하지 못함이 병폐다. 인간은 사물의 한 면에 마음을 빼앗기면 전체를 파악하지 못한다. 편견을 버려야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는데 한쪽 면만을 보고 그게 전부라고 믿으면 마음의 미혹함이 깊어진다.’

순자의 경고처럼 전체를 파악하지 않고 부분에 치중하는 것은 커다란 병폐다. 부분은 전체보다 결코 조화롭지 못하고 지혜롭지도 못하다. 부분은 전체를 반대하고, 그 반대에서 분열이 일어나고 추함이 생겨난다. 결국 전체를 보지 못한 리더는 일을 파국으로 이끈다. 창조적 혁신은 전체를 파악하는 데서 나온다. 부분만 바라보는 시각에서 나올 수 없다. 이를테면 세계적인 명화를 보라. 추상표현주의 미술의 선구적 대표자인 잭슨 폴록, 입체파의 거장 파블로 피카소, 미술과 과학, 대중문화의 전통적인 경계에 도전하는 데미언 허스트가 그린 심금을 울리는 명화들을 부분으로 쪼개보면 전혀 무가치해 보인다. 그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다. 어떤 것이든 부분은 추한 것이고, 전체는 아름답다.

오늘날의 세계는 과거와 다르고, 미래의 세계는 지금과 더더욱 다를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새로운 시각이 필요하다. 북두칠성을 볼 때 그냥 일곱 개의 별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무리로 파악해서 국자 모양으로 인식하듯, 그 어느 때보다 서로 연결하고 통합된 컨텍스트의 사고가 필요한 시점이다.

<한경닷컴 The Lifeist> 정인호 GGL리더십그룹 대표/경영평론가(ijeong1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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