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시, 한시로 만나다] 가을 소리, 미상
가을 소리

미상

한여름 물어물어
찾아간 너의 집 앞
수줍은 코스모스
어설픈 허수아비
네 얼굴
보이지 않고
가을 소리 들리네

[태헌의 한역]
秋響(추향)

盛夏問而問(성하문이문)
君家吾尋訪(군가오심방)
秋英含羞立(추영함수립)
草人頗醜狀(초인파추상)
四顧君不見(사고군불견)
但只聞秋響(단지문추향)

[주석]
* 秋響(추향) : 가을 소리.
盛夏(성하) : 한여름. / 問而問(문이문) : 묻고 또 묻다.
君家(군가) : 그대의 집. / 吾(오) : 나. / 尋訪(심방) : 찾아가다, 방문하다.
秋英(추영) : 가을꽃, 코스모스. / 含羞(함수) : 부끄러움을 머금다, 부끄럽게. / 立(입) : 서다.
草人(초인) : 허수아비. / 頗(파) : 자못, 퍽. 한역의 편의를 위하여 원시에 없는 말을 역자가 임의로 보탠 것이다. / 醜狀(추상) : 못난 모습, 어설픈 모습.
四顧(사고) : 사방을 돌아보다. 한역의 편의를 위하여 원시에 없는 말을 역자가 임의로 보탠 것이다. / 君不見(군불견) : 그대가 보이지 않다. 원시의 “네 얼굴 / 보이지 않고”를 간략히 표현한 말이다.
但只(단지) : 단지, 다만. 한역의 편의를 위하여 원시에 없는 말을 역자가 임의로 보탠 것이다. / 聞(문) : ~을 듣다, ~이 들리다.

[한역의 직역]
가을 소리

한여름부터 묻고 물어
그대의 집 내가 찾았더니
코스모스 수줍게 섰는데
허수아비는 퍽 어설픈 모습
사방 돌아봐도 그대 보이지 않고
그저 가을 소리만 들리네

[한역 노트]
역자는 이 시를 소개하기에 앞서 적지 않은 고민을 해야 했다. 작자가 확인되지 않아 게재 허락을 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익명의 읽을 꺼리를 한역(漢譯)하여 소개하는 것이 과연 합당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역자는 이 코너의 열렬한 독자인 한 벗에게 이 고민을 털어놓았다. 익명으로 된 글을 누군가가 SNS 공간으로 내보냈다면 그것은 불특정 다수가 읽는 것을 반대하지 않겠다는 뜻이고, 그런 읽을 꺼리를 손상시키지 않은 상태에서 한역이라는 새로운 옷을 입혀 세상에 소개하는 게 무슨 문제가 되겠느냐는 것이 바로 그 벗의 뜻이었다. 이에 용기를 얻어 마침내 오늘 이 시를 소개하기에 이르렀다. 혹시 작자 본인이나 작자를 아는 독자께서 이 칼럼을 보고 역자에게 연락을 취해 준다면, 주저 없이 미안한 마음과 함께 감사한 마음을 전해드릴 생각이다.

역자는 원시의 제1행 “한여름 물어물어”를 ‘한여름부터 묻고 물어’라는 의미로 이해하였다. 무슨 사연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제법 오랜 시간을 두고 “너”의 본가(本家)거나 “너”의 시골에 있는 집을 찾기 시작했을 것으로 보인다.

우여곡절 끝에 “너”의 시골집을 찾았더니 집 앞에는 코스모스가 하늘거리고 집과 가까운 들에는 허수아비가 서있다. 이런 풍경은 시골 어지간한 데서 흔하게 만날 수 있는 장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자가 그 코스모스와 허수아비의 관형어로 앉힌 말을 통해 “너”라는 사람을 어느 정도 짐작해볼 수는 있다. “수줍은”에서는 그의 은자적(隱者的)인 삶이, “어설픈”에서는 그의 소략한 성향이 엿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허수아비는 “너”가 만든 것이 아닐 수도 있지만 말이다.

그런데 작자가 어렵사리 찾은 그 “너”는 지금 집에 없다. 아마 작자의 눈길에 들지 않는 제법 먼 들녘에 있거나, 잠깐 마실을 나갔거나, 또 어쩌면 가까운 시내(市內)로 갔을 수도 있겠다. 어떤 경우든 작자가 사전(事前)에 “너”에게 연락을 취하지 않고 불시에 찾아갔을 것이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역자는, 마지막 행인 “가을 소리 들리네”에는 ‘바람’과 ‘기다림’이라는 두 단어가 숨어 있는 것으로 파악한다. 바람이 없었다면 쉬이 소리가 만들어지지 못했을 것이고, 기다림이 없었다면 그 소리가 가을 소리임을 알아채기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단언컨대 작자가 이 시를 지은 때는 초가을이었을 것이다. 역자는 이 시를 처음으로 대하는 순간 이 시의 ‘시기’보다는 상당히 늦은 시기에 지었던 역자의 자작시 하나가 거의 반사적으로 떠올랐다. 초추(初秋)와 만추(晩秋)라는 ‘시기’의 차이는 있지만, 상대방을 바로 만나지는 못했다는 공통분모가 하나의 동질성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사실 이러한 시상(詩想)은, 당(唐)나라 가도(賈島)가 지은 <심은자불우(尋隱者不遇):은자를 찾아갔으나 만나지 못하고>와 같은 시에서 이미 멋들어지게 시화(詩化)되었듯, 오랜 세월 동안 여러 시인들의 붓 아래서 꾸준히 시로 엮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옛사람들의 시에 비하면 격(格)이 한참 떨어지지만, 이 <가을 소리>를 한역하도록 한 계기가 되어준 역자의 졸시를 아래에 첨부해 둔다. 제목은 <만추방우(晩秋訪友):늦은 가을에 벗을 방문하다>이다.

山影偏斜處(산영편사처) 산 그림자 반쯤 비낀 곳에
楓林幾里間(풍림기리간) 단풍 숲이 몇 여리.
葭因風數臥(가인풍삭와) 갈대는 바람으로 인해 눕기를 자주하고
鳥爲雨爭還(조위우쟁환) 새는 비 때문에 돌아가길 다투는데
犬吠門猶掩(견폐문유엄) 개 짖어도 문은 여전히 닫혀있고
葉飛庭自閑(엽비정자한) 낙엽 날리는 뜰은 저절로 한가하기만!
幽人應釣水(유인응조수) 벗님은 응당 물고기 낚고 있을 터,
展目一溪彎(전목일계만) 눈길 펴니 한 줄기 시내가 휘어있구나.

※ 역자는 연 구분 없이 7행으로 이루어진 원시를 6구의 오언고시로 재구성하였다. 짝수 구마다 압운하였으므로, 이 한역시의 압운자는 ‘訪(방)’·‘狀(상)’·‘響(향)’이 된다.

2021. 9. 28.

<한경닷컴 The Lifeist> 강성위(hanshi@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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