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은, 지인의 요청으로 이규보(李奎報) 선생의 시 <石竹花(석죽화)>에 대한 기존의 다양한 번역을 검토하면서 작성한 ‘번역 단상(斷想)’으로 칼럼을 대신합니다.
[한국 현대시, 한시로 만나다] <특집 : 번역 단상(斷想)> 石竹花(석죽화), 李奎報(이규보)
[原詩]
石竹花(석죽화)

李奎報(이규보)

節肖此君高(절초차군고)
花開兒女艶(화개아녀염)
飄零不耐秋(표령불내추)
爲竹能無濫(위죽능무람)

[태헌의 국역]
패랭이꽃

마디는 대나무를 닮아 고상하고
꽃은 피면 아녀자처럼 어여뻐도
가을 못 견디고 흩날려 떨어지니
대나무로 삼기엔 외람되지 않나?

[주석]
* 石竹花(석죽화) : 패랭이꽃.
* 此君(차군) : 대나무의 아칭(雅稱).

[번역 단상]
※ 이 시를 제대로 이해하자면 우선 패랭이꽃에 얽힌 전설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옛날 중국에 힘이 센 장사가 있었다. 그는 인근 마을에 밤마다 사람들을 괴롭히는 석령(石靈)이 있다는 말을 듣고 산으로 올라갔다. 그가 화살을 겨누어 그 돌을 향해 힘껏 쏘았는데 너무나 세게 쏘아 화살이 바위에 깊숙이 박혀서 빠지지가 않았다. 그 후, 그 돌에서 대나무처럼 마디가 있는 고운 꽃이 피었는데 사람들은 바위에서 핀 대나무를 닮은 꽃이라 하여 ‘석죽(石竹)’이라 부르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옛날에 서민들이 쓰던 패랭이 모자를 닮았다고 하여 패랭이꽃으로 불렀다. - 네이버 패랭이꽃 (야생화도감(봄), 2010. 4. 10., 푸른행복)
흔히 제1구의 ‘節’을 ‘절조’의 뜻으로 풀이하나 역자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일단 ‘節’을 ‘절조’의 뜻으로 보면 제2구와의 대(對)가 매우 어색해지기 때문이다. 제2구의 제1자 ‘花’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물을 지칭하는 말이다. 옛사람들은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구체적인 사물은 구체적인 사물끼리 대가 되도록 시구를 엮었다.

다음으로 ‘節’을 ‘절조’의 뜻으로 보면 제3구와 제4구의 의미와도 맥락이 닿지 않는다. 제3구와 제4구는, 패랭이꽃의 이름이 ‘石竹[돌대나무]’이기는 하지만 가을 서리에 시들어버리니, 사철로 푸른[이것이 절조이다] 대나무를 뜻하는 ‘竹’자를 꽃 이름에 쓰는 건 아무래도 손색이 있다고 하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한편 제2구를 “꽃이 피면 아녀자들이 예뻐하네.”로 풀이하는 경우도 있으나 역자는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 패랭이꽃을 아녀자만 예뻐하는 것이 아닐뿐더러, 그렇게 볼 경우의 구법(句法)이나 ‘艶(염)’자의 용법 등이 상당히 어색해지기 때문이다.

또 제4구를 “대나무 되기에는 외람됨[모자람] 없네.”로 번역한 것에도 동의할 수 없다. 제4구의 ‘能無~’는 ‘어찌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는 뜻의 반문(反問)으로 볼 때 시의(詩意)의 전개가 가장 자연스럽다. 굳이 “대나무 되기에는 외람됨[모자람] 없네.”로 보자면 부득이 제3구는 “가을 못 견디고 흩날려 떨어지더라도”로 이해해야만 한다. 그렇다면 패랭이꽃을 대나무로 보기에 손색이 없다고 할 이유는 제1구와 제2구에서 찾아야만 하는데, 보다시피 제1구와 제2구의 내용만으로 패랭이꽃이 대나무와 같은 속성을 지녔다고 보기에는 아무래도 무리다. 한 마디로 말해 오역인 것이다.

오언절구인 이 시는 전문(全文)이 겨우 스무 자일 뿐인데도 보는 견해가 이렇듯 제각각이다. 그러니 어찌 한 글자, 한 구절인들 가볍게 여길 수가 있겠는가? 역자 또한 역자가 미처 생각하지도 못한 오류를 범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음을 솔직히 인정한다. 그래서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번역은 어렵다. 다른 언어로 표현된 타인의 생각을 정확하게 읽어내야만 하는 작업이 어찌 쉬울 수가 있겠는가? 강의가 피를 파는 일이라면 번역은 피를 말리는 일이라던 오랜 벗의 술자리 지론(持論)이 불현듯 떠오른다.

2021. 8. 31.

<한경닷컴 The Lifeist> 강성위(hanshi@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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