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시, 한시로 만나다] 봄날은 간다, 구양숙

봄날은 간다

구양숙

이렇듯 흐린 날에 누가
문 앞에 와서
내 이름 불러주면 좋겠다

보고 싶다고 꽃나무 아래라고
술 마시다가
목소리 보내오면 좋겠다

난리 난 듯 온 천지가 꽃이라도
아직은 니가 더 이쁘다고
거짓말도 해주면 좋겠다

[태헌의 한역]
春日去(춘일거)

如此陰日來門前(여차음일래문전)
誰呼吾名吾自喜(수호오명오자희)
花下酒中忽憶吾(화하주중홀억오)
打電傳音吾自喜(타전전음오자희)
花雖滿地汝猶美(화수만지여유미)
故吐虛言吾自喜(고토허언오자희)

[주석]
* 春日去(춘일거) : 봄날이 가다.
如此(여차) : 이렇듯, 이처럼. / 陰日(음일) : 흐린 날. / 來門前(내문전) : 문 앞으로 오다, 문 앞에 오다.
誰呼吾名(수호오명) : 누가 내 이름을 부르다. / 吾自喜(오자희) : 내가 저절로 기뻐지다, 내가 스스로 기뻐하다.
花下(화하) : 꽃(나무) 아래에서. / 酒中(주중) : 술을 마시는 중에, 술을 마시다가. / 忽(홀) : 문득, 불현듯. / 憶吾(억오) : 나를 생각하다. 원시의 “보고 싶다고”를 역자가 의역한 표현이다.
打電(타전) : 전화를 걸다. 한역의 편의를 위하여 원시에 없는 말을 역자가 임의로 보탠 것이다. / 傳音(전음) : (목)소리를 전하다.
花(화) : 꽃. / 雖(수) : 비록 ~할지라도. / 滿地(만지) : 땅에 가득하다, 천지에 가득하다. / 汝猶美(여유미) : 네가 오히려 예쁘다.
故(고) : 짐짓, 일부러. 한역의 편의를 위하여 원시에 없는 말을 역자가 임의로 보탠 것이다. / 吐虛言(토허언) : 거짓말을 하다.

[한역의 직역]
봄날은 간다

이렇듯 흐린 날에 문 앞에 와서
누가 내 이름 불러주면 난 절로 기쁘겠다
꽃 아래서 술 마시다 불현듯 내가 생각나
전화 걸어 목소리 전해주면 난 절로 기쁘겠다
“꽃이 천지에 가득해도 네가 오히려 예쁘다”고
일부러 거짓말도 해주면 난 절로 기쁘겠다

[한역 노트]
흐린 날은 누구나 우울해지기 쉽다. 그런 날 나를 찾아와 내 이름을 불러주는 친구가 있다면, 커피를 내려 권하고 음악을 들으면서 유쾌하게 수다도 떨며, 봄날 한 때를 즐길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가볍게 술잔을 주고받으며 얘기 나누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시인의 문 앞에 와서 이름을 불러주는 친구가 지금은 없다.

봄밤에 꽃나무 아래서 술을 마셔본 사람이라면, 그것이 얼마나 운치가 있는 풍류(風流)인지를 알 것이다. 그러나 그런 술자리라도 친구가 전화를 걸어 무작정 나오라고 하면, 난감하다 못해 당황스럽거나 괴로울 때가 많다. 친구의 요구에 응하지 못할 특별한 사정이 없더라도 상황이 별반 다르지 않은 것은, 예정에도 없던 즉석 호출이 때로 불편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럴 때에 그냥 전화를 걸어 분위기가 너무 좋다며, 네가 보고 싶다며 이런 저런 얘기를 들려준다면 오히려 고맙지 않을까 싶다. 취기로 인한 친구의 객쩍음 때문에 얼마간의 시간 손실은 각오해야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그런 곳에서 술을 마시며 시인에게 전화를 해주는 친구가 지금은 없다.

봄은 꽃들의 세상이다. 온갖 종류의 꽃들이 천자만홍(千紫萬紅)으로 피어나면 정말이지 정신이 아뜩할 정도가 된다. 그런 때문일까? 옛날부터 사람들은 미녀를 꽃에 견주는 경우가 많았다. 말을 알아듣는 꽃이라는 뜻의 ‘해어화(解語花)’가 양귀비(楊貴妃)를 지칭한 것이기는 하지만, 후대에는 미녀의 대명사로 자주 쓰였다. 여기서 더 나아가 꽃보다 더 예쁘다고 한다면, 미녀에 대한 찬사로는 최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동안, 아니 오랫동안 꽃보다 더 예쁘다는 말을 들었을 시인에게 이 말을 들려주는 사람이 이제는 없는 듯하다. 살다 보면 거짓말이 때로 진실보다 더 인간적이고 그리울 때가 있다. 그러므로 거짓말인줄 알면서도 아직은 꽃보다 더 예쁘다는 말을 듣고 싶은 사람이 시인 한 사람 뿐은 아닐 것이다. 역자의 짐작에는 시인 또래 여성들의 대다수가 그런 마음이지 않을까 싶다.

찾아오는 친구도, 술자리에서 전화를 걸어주는 친구도, 거짓말을 해주는 사람도 없는 가운데 봄날은 간다. 눈앞의 봄과 함께 인생의 봄도 보내야만 하는 시인의 마음자리가 안타깝기만 하다. 가는 세월을 머물려둘 수가 없기에 우리는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다. 흘러간 강물이나 날아간 홀씨처럼, 지나간 청춘도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러기에 막바지 청춘의 끝자락에 서있을 듯한 시인의 심사가 바로 독자의 심사가 되어 애잔하게 다가오는 것이다.

시에서 직접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은 이 시의 제목은 오래된 대중가요의 제목인 “봄날은 간다”에서 취하였을 것이다. 제목에 유의하면서 이 시를 감상하노라면, “아직은”이라는 단어 하나가 예사롭지 않게 눈에 들어온다. “아마 곧 ~하게 되겠지만”이라는 앞말이 생략된 이 단어야 말로 제목이 주는 비애감을 절박하게 내보이는 말이라 할 수 있을 듯하다.

역자는 3연 9행으로 이루어진 원시를 6구의 칠언고시로 재구성하였다. 한역하는 과정에서 제2연의 경우는 시어의 배열을 다소 파격적으로 가져가면서 생략된 시어도 보충하였다. 3연에서는 일부 시어의 한역을 생략하였으며, 모든 연 끝에 반복적으로 보이는 “좋겠다”는 의미를 다소 풀어서 한역하였다. 이 한역시는 짝수구마다 동자(同字)인 ‘喜(희)’로 압운하였다.

* 제법 여러 해 전 꽃이 좋던 어느 봄날 밤에, 한 가인(佳人)의 사진을 보다가 불현듯 시상이 일어 지어보았던 졸시 하나를 말미에 붙여둔다. 이런 시가 공연히 부끄러움을 더하는 일이란 걸 모르지 않지만 속절없이 지는 꽃이, 또 속절없이 가는 세월이 아쉬워 허허롭게 느낀 마음 자락을 표해 두는 것일 뿐이니, 너무 허물하지는 마시길 바란다.

春宵(춘소)
春宵花影低(춘소화영저)
何事眞淸逸(하사진청일)
非酒亦非詩(비주역비시)
枕依佳女膝(침의가녀슬)

봄밤
봄날 밤 꽃그늘 아래에서
무슨 일이 정말 멋있을까
술도 아니고 시도 아니고
미인의 무릎 베는 것이리

2021. 5. 11.

<한경닷컴 The Lifeist> 강성위(hanshi@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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