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수칼럼]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배은망덕한 이 놈!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병원에 사표를 낸다고? 날 죽이고 내!”

“어머니! 내가 꼭 준암대 병원장이 아니더라도 어머니 아들 맞잖아요! 나 그냥 엄마 아들이면 안돼요?”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많이 놀랐다. 요즘 화제의 드라마 ‘SKY캐슬’에서 극중 모자지간인 배우 정애리와 정준호의 대화다. 대화 배경은 대충 이렇다. 병원장이 되기 위해 지금까지 노력한 것들을 모두 포기하겠다는 아들에게 화가 난 어머니가 이런 말을 했다. 눈물과 절규와 낙심과 회상이 그대로 묻어난 딱 한마디.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어쩜 나랑 똑같은 말을 하는 엄마가 있구나!”

두 해 전 일이다. 아들과 크게 싸웠다. 아들은 ‘하고 싶어’ 했고 필자는 ‘반대’했다. 시작은 대화였지만 엄청난 감정들을 담은 말이 오가고 끝이 났다.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엄마! 제 맘대로 할 거예요!”

“안 된다고 하잖아! 너를 위해서야!”

“왜 안돼요! 제 인생이잖아요!”

“야!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아들은 키가 186센티미터다. 아들이 위에서 필자를 내려다보며 소리쳤다. 아니 마구 대들었다. 아들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있었다. 세게 꽉 쥔 주먹은 빨갰다. 게다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 때 필자는 사실 후회하고 있었다. 어떤 엄마가 가슴아파하는 아들을 보고 마음이 편할까. ‘내가 이렇게까지 반대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 자기 생각을 굽히지 않는 것이 ‘이제 다 컸구나!’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곧 필자 마음을 알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당장 ‘왜 반대하는지’ 필자의 마음을 몰라주고, 들으려 하지 않는 아들이 너무 미웠다.

필자도 자식이다. 필자 어머니는 어땠을까? 부모 말을 잘 듣는 딸은 아니었다. 그러니 아들은 여지없이 필자를 닮은 것이다. 그것도 닮기를 바란 것은 닮지 않고, 제발 닮지 말았으면 한 건 어쩜 똑 닮았다. 여하튼 유전자는 무섭다.

속상한 마음으로 어머니를 찾았다.

“엄마도 자식이 미운 적 있었어요?”

“휴우, 말도 마라! 엄청나지. 억수로 밉었다!”

“에고, 죄송해요. 지금이라도 너무 미안해서”

“괘안타. 그게 자식이지! 그래야 자식이다!”
[이지수칼럼]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며칠 전 설거지를 하는데 절친한 이웃 언니가 찾아왔다. 갑작스런 방문에 너무 놀랐고 반가웠다. 언니는 지난 4년간 남편 일로 일본에서 살았다. 그래서 몇 년 만에 만났는데도 어제 만나고 오늘 또 만난 듯 했다. 못 만난 사이 남편이 정년퇴직을 했고 아들은 취업했다고 한다. 그리고 두 달 뒤 딸이 결혼한단다.

“언니네 딸 아들은 어쩜 착하고 잘 되고. 정말 부러워요!”

“무슨 말이고. 자식이 다 똑같지. 애 먹었지.”

“네?”

“자식은 올라오는 게 없는 법이야. 아래로만 흐르지.”

“아!”

“부모 공은 없어. 지들이 잘 나서 잘된 줄 알아.”

“호호호. 언니랑 이런 얘길 나누니 제 속이 후련하네요!”

이 글을 드라마로 시작했으니 드라마로 맺고 싶다. 흔히 인생은 한 편의 드라마라고 한다. 드라마를 보며 ‘세상에 저런 일이…’라며 자못 놀라지만 막상 현실에서 그 보다 더한 일이 많다. 뉴스만 보아도 그렇다. 요즘 최고 화제의 드라마 ‘SKY캐슬’도 마찬가지다.

부모라면 누구나 사랑하는 자녀가 순탄한 인생을 살기 바란다. 하지만 드라마 ‘SKY캐슬’은 여기에 부모의 지나친 ‘욕심’이 붙으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잘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아마 ‘부모가 자녀에게 무엇을 심느냐’에 따라 어떤 열매를 맺는지 알리려는 의도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해보자. 자녀가 <열매>라면 부모는 <뿌리>인 셈이다.

식물에서 뿌리는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뿌리가 썩으면 열매는 고사하고 줄기조차 자라지 못하고 죽기 때문이다. 열매도 마찬가지다. 뿌리가 튼튼해야 열매를 얻는다. 결국 뿌리가 모든 <시작>과 <끝>인 것이다. 여기서 재미있는 사실은 뿌리는 열매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지만, ‘열매는 뿌리에게 돌아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필자도 <엄마>가 되어 살아보니 이제 조금은 알 것 같다. 흔히들 말하는 ‘자식은 농사(?)’가 결코 아니란 것을! 그리고 자식이 성장할수록 자식은 성공이나 대가를 위한 <욕심의 대상>이 아닌 <욕심을 내려놓음>이라는 것을 배우게 된다. 비록 소리 질러 싸워도 보고 주먹 불끈 쥐고 대항하더라도 그러면서 욕심을 내려놓으니 필자의 ‘마음 뿌리’가 건강해지는 느낌이다.

그러면서 이 순간에도 속으로 크게 외쳐본다.

“니도 애비가 돼 바라!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이지수20190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