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를 한지도 어언 십 수 년이 흘렀다. 이런 저런 만남과 모임도 몇 이 있다. 그중 십 여 년이 흘렀지만 참 마음이 편안하고 모든 회원이 다 친근한 이웃 같은 분위기가 물씬 나는 모임이 하나 있다. 감리사 동기 목사들이다. 다섯 가정이 몇 차례 국내 여행과 국외 선교 지를 방문하기도 했다. 그래서 이제는 형님과 아우 같고 사모는 형수 같다. 가을의 단풍이 한창 물든 백담사를 다녀왔다. 백담사 입구에 목회 하는 지인 목사의 초대로 다녀왔다. 주일 오후 일정을 마치고 함께 차를 동승하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일탈을 시작했다. 내려가는 도로는 씽씽 잘 달렸다. 올라오는 도로는 주차장을 방불할 만큼 밀렸다. 신나게 달려 행선지에 도착을 해 맛난 황태 구이와 산나물로 저녁을 먹고 저녁 예배를 참석했다. 회원 중 연장 목사의 설교와 남편 목사는 수작업으로 만든 대나무 피리로 부인 사모는 드럼을 치며 특별 연주를 했다. 참 은혜로웠다. 오랜 만에 시골 교회에 다섯 목사와 사모가 함께 드리는 예배가 훈훈했을 것이다. 은혜가 되었던지 어떤 성도 가정에서 다음날 아침 대접을 하시겠다고 약속을 받았다. 펜션에서 편안한 하룻밤을 잤다. 아침 대접을 잘 받고 백담사로 올라갔다. 처음으로 가는 길이다. 말로만 들었던 백담사였다. 들어가는 입구에는 모든 차들이 다 내려 셔틀버스를 타고 백담사로 간다. 올라가는 길이 좁다. 그래서 올라가는 차와 내려오는 차가 서로 만나 비켜가는 곳에서는 기다렸다가 쌍방이 통행을 해야 한다. 좌우에 펼쳐지는 풍광을 보면서 가을의 분위기를 느꼈다. 백담사에 도착해 이곳저곳을 돌아보았다. 전직 대통령이 머물렀다고 하는 작은 방도 보았다. 그 중 발걸음이 제법 머물게 한 곳은 만해 한용운 기념관이었다. 기념관을 참관하다가 사진을 몇 컷 찍었다. 그중 두 액자에 걸린 사진이 인상적이었다. 하나는 논설이고 다른 하나는 연설문이다. 만해를 그 동안 ‘님의 침묵’의 저자와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중 하나 정도로 밖에 몰랐다. 그러다가 기념관에서 접한 논설과 연설은 돌아오면서 여운을 남기게 하였다.
논설은 ‘수양독본 제2과 고난의 칼날에 서라’이다. 1922년 실생활지(誌)에 실린 글이라 풀어서 정리를 했다. 그 내용은 이렇다. “세상 사람들이 쉽고 성공할 일이면 하려하고 어렵고 성공할 가망이 적은 일이면 피하려는 경향이 있으니 그것은 불 가한 일이다. 어떠한 일을 볼 때에 쉽고 어려운 것이나 성공하고 실패할 것을 먼저 본다는 것 보다 그 일이 옳은 일인가 그른 일 인가를 볼 것이다. 아무리 성공할 일이라도 그 일이 근본적으로 옳지 못 한 일이라 하면 일시 성공을 하였을지라도 그것은 결국 파탄이 생기고 마는 법이다. 그러므로 하늘과 땅에 돌아보아 조금도 부끄럽지 않을 옳은 일이라 하면 용감하게 그 일을 하여라. 그 길이 가시밭이라도 참고 가거라. 그 일이 칼날에 올라서는 일이라도 피하지 마라. 가시밭을 걷고 칼날 위에 서는 데서 정의를 위하여 자기가 싸운다는 통쾌한 느낌을 얻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지금 다난 한 조선에 있어서 정의의 칼날을 받고 서거라 하고 말하고 싶다. 무슨 일이든지 성공이나 실패보다 옳고 그른 것을 먼저 분변 할 줄 알아야 한다.”
연설문은 이렇다.“세상에서 제일 더러운 것은 무엇인지 아십니까? 제일 더러운 것을 똥이라고 하겠지요. 그런데 똥보다 더 더러운 것은 무엇일까요? 나의 경험으로는 송장 썩는 것이 똥보다 더 더럽더군요. 왜 그러냐 하면 똥 옆에서는 음식을 먹을 수가 있어도 송장 썩는 옆에서는 역하여 차마 먹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송장보다 더 더러운 것이 있으니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건 삼십일 본산 주지 바로 네놈들이다“. 한국 불교를 일본에 예속 시키려는 총독부의 방침에 따라 개최된 31 본사 주지회의에서 만해가 한 연설문이라는 설명이 있다.
한참 세월이 흘렀지만 만해가 보았던 세상과 종교는 어쩌면 오늘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싶다. 그의 논설 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로 가도 한양이라는 말이 있듯,성공만 하면 된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옳고 그름이 아닌가 싶다. 성도들에게 가끔 설교를 할 때 속도보다 중요한 것은 방향이라고 한다. 꿩 잡는 것이 매가 아니다. 제대로이다. 그리고 옳음이라면 외롭고 힘이 들더라고 올 곧게 그 길을 가는 결기도 있어야 한다. 종교는 어떤가? 어느 종교이든 종교 지도자는 이 시대의 마지막 보루이다. 더 이상 무너져서는 안 되는 전선과 같다. 그런데 그 전선마저 여기저기서 무너지는 소리가 들린다. 그래서 역겹다는 소리를 하기도 한다. 가장 깨끗하고 아름다워야 할 종교 지도자가 가장 더럽다고 한탄했던 만해의 일침이 종교인의 삶을 사는 나를 돌아보게 한다.
어느 10월의 짧은 하루의 일탈이 마음을 개운하게 하고 나를 잠시 나마 돌아보게 해서 좋았다. 역시 일상에서 잠시의 일탈은 필요하다.
다음은 최근에 어느 지인으로부터 받은 질문이다. 아파트 임차인이 자연인 개인이 아니라 법인일 경우, 소속 직원 숙소용으로 주거용 아파트를 임차한 후 직원이 해당 주택에 주민등록했다면, 임차인인 중소기업이 주택임대차보호법상의 계약갱신요구권을 행사할 수 있을까? ★ 주택임대차보호법 제6조의3(계약갱신 요구 등)① 제6조에도 불구하고 임대인은 임차인이 제6조제1항 전단의 기간 이내에 계약갱신을 요구할 경우 정당한 사유 없이 거절하지 못한다. 다만,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경우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1호 내지 9호 중략>② 임차인은 제1항에 따른 계약갱신요구권을 1회에 한하여 행사할 수 있다. 이 경우 갱신되는 임대차의 존속기간은 2년으로 본다.③ 갱신되는 임대차는 전 임대차와 동일한 조건으로 다시 계약된 것으로 본다. 다만, 차임과 보증금은 제7조의 범위에서 증감할 수 있다.④ 제1항에 따라 갱신되는 임대차의 해지에 관하여는 제6조의2를 준용한다.즉답이 쉽지 않았다. 대답을 머뭇거리면서,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지인에게 반문했다. 지인분 왈, “중소기업이 직원숙소용으로 임차 중인 어느 아파트를 실거주용으로 매수하려고 하는데, 임차인 법인이 갱신요구권을 행사할 수 있는지에 따라 매수여부를 결정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갱신요구권을 가지는지 여부가 매수결정에 중요한 관건이 될 수 밖에 없는 사안이라, 정확한 답변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리서치 할 수밖에 없었고, 그 덕분에 이 칼럼까지 만들게 되었다. 법인이 직원 숙소용으로 주거용 건물을 임차하는 위와 같은 경우를 판단함에 있어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는 규
중학교 다니던 시절, 한자 ‘참 진(眞)’자를 쓸 때였다. 네모 칸에 맞춰 ‘눈 목(目)’자를 마칠 즈음 위에 붙은 ‘비수 비(匕)’를 ‘칼 도(刀)’로 잘못 쓴 걸 알았다. 글자에 얼른 빗금을 쳤다. 그래도 맘에 안 들어 동그라미를 계속 둘러쳐서 글자가 보이지 않게 시커멓게 칠했다. 지켜보던 아버지가 냅다 호통치며 그때 하신 말씀이다. “한번 마음먹은 일은 함부로 바꾸지 마라!” 아버지는 말씀이 길었다. 다리에 쥐가 나도록 꿇어 앉혀놓고 길게 말씀하셨다. 그날도 그러셨다. 아버지가 덧붙인 말씀을 알아들은 대로 정리하면 이렇다. “쓰던 글자가 잘못됐다는 것을 알면 바로 고치거나 지울 일은 아니다. 시작한 글자는 틀린 대로 마무리해라. 틀린 글자는 정정 표시를 하고 제대로 된 글자를 다시 써라. 그래야 어디서부터 뭐가 잘못된 건지 온전하게 알 수 있다. 저렇게 새까맣게 뭘 시도한 건지도 모르게 칠해놓으면 반성과 성장의 기회를 잃는다. 더욱이 너를 지켜보거나 따르는 이들은 우두망찰하게 된다. 가던 길을 갑자기 멈춰서서 없던 일처럼 해버리면 너를 따르는 이들은 뭐가 되느냐. 모름지기 언행은 한결같아야 한다.” 아버지는 고작 중학생인 내게 낯선 용어인 일관성(一貫性)을 말씀하셨다. 그날 이후에도 잔소리처럼 말씀하셔서 외우게 됐다. 일관성은 일이관지(一以貫之)에서 왔다. 하나의 이치로써 모든 것을 꿰뚫는다는 뜻이다. 논어(論語) 위령공편(衛靈公篇)에 나온다. 공자(孔子)가 제자 자공(子貢)에게 한 말에서 비롯했다. “사(賜)야, 너는 내가 많이 배워서 그것을 모두 기억하는 줄로 아느냐? 아니다. 나는 하나로 꿸 뿐이다[予一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