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시, 한시로 만나다] 무더위, 박인걸
무더위



박인걸



당신의 뜨거운 포옹에

나는 더 이상 저항하지 못하고

무장해제 당하고 말았다.



다리는 후들거리고

두 팔은 힘이 쭉 빠지고

얼굴은 화끈거리고

심장은 멈출 것만 같다.



온몸으로 전달되는

그대 사랑의 에너지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류처럼 번져나간다.



잔디밭이라도

어느 그늘진 곳이라도

아무 말 없이 드러누울 테니

그대 맘대로 하시라.



【태헌의 한역】

蒸炎(증염)



吾君抱持似熱火(오군포지사열화)

吾終不拒自暴棄(오종불거자포기)

兩脚瑟瑟臂無力(양각슬슬비무력)

顔面發紅心欲止(안면발홍심욕지)

吾君愛力籠全身(오군애력롱전신)

從頭到尾通電氣(종두도미통전기)

不問是綠莎(불문시록사)

還是陰凉地(환시음량지)

無言自倒卧(무언자도와)

吾君可隨意(오군가수의)



[주석]

* 蒸炎(증염) : 무더위, 찌는 듯한 더위.

吾君(오군) : 그대, 당신. / 抱持(포지) : 포옹(抱擁). / 似熱火(사열화) : 열화[뜨거운 불]와 같다.

吾(오) : 나. / 終(종) : 끝내, 마침내. / 不拒(불거) : 거부하지 못하다, 저항하지 못하다. / 自暴棄(자포기) : 스스로 포기하다, 자포자기하다. ‘暴棄’는 ‘抛棄(포기)’와 같은 말.

兩脚(양각) : 두 다리. / 瑟瑟(슬슬) : 떠는 모양. / 臂無力(비무력) : 팔에 힘이 없다.

顔面(안면) : 얼굴. / 發紅(발홍) : 붉어지다, 화끈거리다. / 心欲止(심욕지) : 심장이 멈추려고 하다.

愛力(애력) : 사랑의 에너지, 사랑의 힘. / 籠全身(농전신) : 온 몸을 감싸다.

從頭到尾(종두도미) : 머리부터 발끝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 通電氣(통전기) : 전기가 통하다.

不問(불문) : 묻지 않다, 따지지 않다. / 是(시) : ~이다. / 綠莎(녹사) : 잔디밭.

還是(환시) : 또 ~이다, 다시 ~이다. ‘是A還是B’는 ‘A이든 B이든’이라는 뜻을 가지는 문형이다. / 陰凉地(음량지) : 그늘져 서늘한 곳, 그늘진 곳.

無言(무언) : 말없이. / 自倒卧(자도와) : 스스로 드러눕다.

可隨意(가수의) : 마음대로 해도 좋다, 마음대로 할 수 있다.



[직역]

무더위



당신의 포옹이 뜨거운 불과 같아

나는 끝내 저항 못하고 스스로 포기하였다

두 다리는 후들거리고 팔은 힘이 빠지고

얼굴은 화끈거리고 심장은 멎을 듯하다

그대 사랑의 힘이 온 몸을 감싸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기가 흐른다

잔디밭이든

아니면 그늘진 곳이든 묻지 않고

말없이 스스로 드러누우리니

그대 맘대로 하시라



[한역 노트]

동양에서 변설(辯舌)로 이름이 높았던 맹자(孟子)나 혜시(惠施)와 같은 이들이 비유(比喩)를 화술(話術)의 주무기로 삼았다는 것은 그다지 새삼스러운 이야기도 아니다. 서양의 L.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 같은 이는 훌륭한 비유는 지성을 신선하고 활기 있게 해준다고도 하였다. 박인걸 시인의 위와 같은 시를 보고 있노라면 확실히 비유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알 수가 있다.

무더위를 열정적이지만 우악스런 남성에 비유하고, 무더위에 노출된 사람들을 연약하고 수동적인 여성에 비유한 시인의 상상력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이 시 역시 지난번에 소개한 권옥희 시인의 <여름 숲>과 마찬가지로 19금 시로 간주될 것이 틀림없겠지만, 이러한 시가 있어 한여름의 무더위조차 때로 즐길 만한 것은 아닐지 모르겠다.

4연 15행으로 구성된 원시를 역자는 칠언 6구와 오언 4구로 재구성하였다. 한역(漢譯)하는 과정에서 역자가 원시에 사용된 어휘나 원시의 어순 등을 제법 바꾸었지만, 이 부분에 대한 세세한 설명은 생략하기로 한다. 이 한역시는 짝수 구마다 압운하였으며, 그 압운자는 ‘기(棄)’, ‘지(止)’, ‘기(氣)’, ‘지(地)’, ‘의(意)’이다.


2019. 8. 13.


강성위 한경닷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