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씌어진 시

                                       윤동주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 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적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내일(12월 30일)은 윤동주 시인의 100번 째 생일이다. 하필 한 해의 끝자락에 태어났기 때문일까. 그의 삶도 벼랑끝처럼 아슬아슬했다. 1917년 혹한의 북간도에서 나 암흑의 시대와 맞서다 28세에 독립을 6개월 앞두고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세상을 떠났으니 기구하기 그지없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작품 ‘쉽게 씌어진 시’는 일본 경찰에 체포되기 1년 전에 쓴 것이다. 서정시를 쓸 수 없는 시대의 슬픔을 반어적으로 표현하고 싶었으리라.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볼까’로 시작하는 첫머리부터 나라 없는 청년의 고뇌가 짙게 묻어난다.

남의 나라 외딴 방에서 그는 ‘무얼 바라’ ‘홀로 침전’했던 것일까. 식민지 유학생으로 어두운 시대를 견디는 ‘슬픈 천명’에 가슴이 미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한없이 가라앉는 ‘침전’의 밑바닥에서도 그는 희망을 준비했다.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자세가 그것이다.

어쩌면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에서 곧 닥칠 비극을 예감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이마저도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로 내면에서 승화시키고 싶어 했으나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에도 불구하고 1년 뒤 일경에 붙잡혔다. 그러고는 차가운 감옥에서 최후를 맞았다.

이 시를 쓴 시기는 일본 도쿄의 릿쿄대(立敎大)에 입학한 1942년 6월 3일이다. 육첩방은 다다미 6장(六疊)을 깐 좁은 방(약 3평)을 말한다. 일본 다도(茶道)에서 소박한 다실(茶室)을 표현할 때 ‘다다미 넉 장 반’이라고 하니 짐작할 만하다.

그는 도쿄 변두리 2층집에서 하숙했다. 그곳을 방문한 문익환 목사는 훗날 “2층의 하숙방은 그야말로 육첩방이었는데 동주는 교토로 옮겨가려고 이삿짐을 싸고 있었다”고 했다.

그해 10월 교토 도시샤대(同志社大)에 편입한 그는 이듬해 7월 14일 체포됐다. 여름방학 때 고향에 가려고 기차표를 사놓고 짐도 다 부친 상태였다.

이 시는 그가 1945년 2월16일 형무소에서 숨을 거둔 지 2년 만에 정지용 시인의 소개로 국내에 알려졌다. 그의 정신적 스승이자 당대 최고 시인인 정지용이 1947년 2월 13일자 경향신문에 소개 글과 함께 발표했다. 동주의 기일(2월 16일)에 맞춰 정지용 등 30여 명이 소공동 플라워회관에서 추도회를 열기 직전이었다.

그 시절 경향신문은 목·일요일에 4면, 다른 날엔 2면을 발행했다. 주필인 정지용은 2월 13일 목요일자 4면에 이 시를 싣고 해설을 곁들였다.

“복강(福岡·후쿠오카)형무소에서 복역 중 음학한 주사 한 대를 맞고 원통하고 아까운 나이 29세(만 28세)로 갔다. 일왕이 항복하던 해 2월 16일 일제의 최후 발악기에 ‘불령선인’이라는 명목으로 꽃과 같은 시인을 암살하고 저이(저희)도 망했다. 시인 윤동주의 유골은 용정동 묘지에 묻히고 그의 비통한 시 10여 편은 내게 있다. 지면이 있는 대로 연달아 발표하기에 윤 군보다도 내가 자랑스럽다.”

윤동주의 유작 ‘또 다른 고향’과 ‘소년’은 같은 해 3월 13일, 7월 27일자에 실렸다. 여기에는 경향신문 조사부 기자였던 강처중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연희전문 기숙사의 삼총사 중 한 명인 그는 윤동주가 일본에서 보낸 편지 속의 시 5편을 몰래 숨겨서 보관했다가 빛을 보게 한 일등공신이다.

동주의 흔적은 교토와 후쿠오카 등 여러 곳에 남아 있다. 도시샤대 교정과 하숙집이 있던 자리인 교토조형예술대에 그의 시비가 있다. 체포되기 한 달 전 학우들과 소풍 가서 사진을 찍은 우지(宇治)시의 우지천(川) 옆에도 최근에 시비가 세워졌다.

그러나 도쿄에서 교토로 옮겨간 뒤 그의 시는 한 편도 발견되지 않았다. ‘쉽게 씌어진 시’ 이후 그는 시를 전혀 쓰지 않았던 것일까. 늦은 밤 술자리나 경찰에 쫓기는 중에도 틈틈이 시작 메모를 했던 그가 1년 넘게 아무것도 쓰지 않았다는 건 믿기 어렵다.

그는 구치소와 감옥에 있을 때에도 자신의 ‘불온 작품’을 일본어로 번역해 내라는 순사의 독촉을 받았다. 그러니 연필과 종이가 곁에 있었을 것이다. 죽기 전 감옥 벽에 못자국으로라도 흔적을 남겼을 동주가 아닌가.

아쉽게도 형무소는 옮겨가고 없지만, 그의 또 다른 유작이 어디선가 우리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이제라도 그의 미발표 원고를 발굴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한·일 양국에서 펼쳐 온 탄생 100주년 행사들도 이제 끝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