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학루(黃鶴樓)

                                   최호


옛사람 황학 타고 이미 떠났거니

이 땅에 황학루만 덧없이 남았네.

황학은 한 번 가고 오지 않는데

흰 구름은 느릿느릿 천년이어라.

한양 숲 또렷이 맑은 물에 어리고

앵무주 가득 메운 꽃다운 봄풀

날 저무니 고향은 어디메뇨

연파(煙波) 이는 강 언덕에 시름겨워라.



昔人已乘黃鶴去 此地空餘黃鶴樓

黃鶴一去不復返 白雲千載空悠悠

晴川歷歷漢陽樹 芳草萋萋鸚鵡洲

日暮鄕關何處是 煙波江上使人愁.



황학루는 중국 후베이성(湖北省) 우한(武漢)의 창장(長江·양쯔강)에 있는 누각이다. 악양루, 등왕각과 함께 중국의 강남 3대 명루로 꼽힌다. 원래는 삼국지에 등장하는 손권이 서기 223년 유비와의 전쟁에 대비해 세운 망루다.

한 신선이 술값 대신 벽에 누런 학을 그렸는데 후에 그 학을 타고 구름 위로 날아가자 술집 주인이 누각을 세웠다는 전설도 전해져 온다. 촉(蜀)나라의 비위(費褘)가 신선이 돼 황학을 타고 여기 와 쉬었다는 설도 있다.

이 지역은 예부터 창장(長江)과 한수이(漢水)가 만나는 지점이었기에 농수산물이 풍부하고 교통도 발달했다. 그래서 수많은 왕조의 흥망성쇠가 거듭됐고, 그때마다 군사적 요충지로서 피비린내 나는 격전장이 돼야 하는 아픈 역사를 지녔다. 황학루가 군사용 망루였던 것도 이 때문이다.

당, 송 시대를 지나며 시인묵객들의 풍류를 위한 누각으로 변했는데, 격변의 세월을 거치는 동안 워낙 자주 훼손돼 몇 번이나 다시 지었다. 1985년 중건된 지금의 누각 내부에는 엘리베이터까지 설치돼 있다.

누각 4층에 오르면 이곳을 노래한 역대 명인들의 작품이 죽 걸려 있다. 그중에서 가장 뛰어난 시가 당나라 시인 최호(崔顥·704?~754)의 ‘황학루’다.

이백이 이곳에서 강물을 내려다보며 시상에 젖어 있다가 최호의 시를 발견하고는 ‘더 이상 무슨 말로 황학루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겠느냐’며 붓을 던졌다고 한다. 이 일화가 퍼지면서 최호의 ‘황학루’는 당시(唐詩) 제1의 절창으로 추앙받게 됐다.

이백은 이곳을 떠나 금릉에 가서 ‘봉황대에 올라(登金陵鳳凰臺)’를 짓고서야 한을 풀었다고 한다. 자세히 보면 두 시가 제법 닮았다. 지세나 정감뿐만 아니라 장구(章句)와 운각(韻脚)까지 같으니 두 천재의 걸작을 비교 감상하는 재미 또한 깊고 차지다.

   봉황대에 올라(登金陵鳳凰臺)

                                     이백


봉황대 위에 봉황이 놀았다지만

봉은 가고 대도 비고 강만 흐르네.

오나라 궁전 미녀들도 길에 묻혔고

진나라 때 왕족들도 옛 무덤 됐네.

삼산은 하늘 밖에 반쯤 걸려 있고

이수는 백로주를 갈라 흐른다.

그 모두 뜬구름 해를 가리어

장안도 아니 뵈니 시름겨워라.



鳳凰臺上鳳凰遊 鳳去臺空江自流

吳宮花草埋幽徑 晉代衣冠成古丘

三山半落靑天外 二水中分白鷺洲

總爲浮雲能蔽日 長安不見使人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