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시, 한시로 만나다] 역사(驛舍) 앞에는 흰 눈이 펄펄 내린다, 이중열

역사(驛舍) 앞에는 흰 눈이 펄펄 내린다



이중열



‘커피 한잔 사주세요’


노숙인의 목소리가


눈 사이로 들려온다



때마침 신사가 있어


외투를 입혀준다


장갑도 벗어 건네준다



‘따뜻한 거 사드세요’


지갑을 열어 오만원을 준다



총총히 길을 가는 그 사람


역사 앞에는 흰 눈이 펄펄 내린다



[태헌의 한역]


玉屑飄飄驛舍前(옥설표표역사전)



請君向我惠咖啡(청군향아혜가배)


行旅聲音聞雪邊(행려성음문설변)


適有紳士解袍授(적유신사해포수)


手帶掌甲脫而傳(수대장갑탈이전)


却曰須賣溫暖食(각왈수매온난식)


開匣還贈五萬圓(개갑환증오만원)


斯人匆匆行己路(사인총총행기로)


玉屑飄飄驛舍前(옥설표표역사전)



[주석]


玉屑(옥설) : 옥의 가루. 여기서는 눈(雪)을 아름답게 칭하는 말로 쓰였다. / 飄飄(표표) : 바람에 날리는 모양, 나부끼는 모양, 펄펄. / 驛舍前(역사전) : 역사(驛舍) 앞. 여기서는 서울역 앞 광장을 가리킨다.


請君(청군) : 그대에게 청하다, 그대에게 부탁하다. / 向我(향아) : 나에게. / 惠(혜) : ~을 내려주다, ~을 보내주다. / 咖啡(가배) : 커피(coffee).


行旅(행려) : 나그네, 길손. 역자는 여기서 노숙인의 의미로 사용하였다. / 聲音(성음) : 소리, 목소리. / 聞雪邊(문설변) : <내리는> 눈 가운데서 들리다. ‘邊’에는 어떤 범위의 안이나 속이라는 뜻이 있다.


適(적) : 마침, 때마침. / 有(유) : ~이 있다. / 紳士(신사) : 신사. / 解袍授(해포수) : 외투를 벗어 주다. ‘袍’는 보통 도포라는 뜻으로 쓰나 여기서는 외투라는 의미로 사용하였다.


手帶掌甲(수대장갑) : 손에 끼고 있는 장갑. ‘掌甲’은 현대 중국어의 ‘手套(수투)’에 해당되는 한자어이다. ‘手帶’는 한역의 편의를 위하여 원시에 없는 말을 역자가 임의로 보탠 것이다. / 脫而傳(탈이전) : 벗어서 전해주다.


却曰(각왈) : 문득 말하다. 한역의 편의를 위하여 원시에 없는 말을 역자가 임의로 보탠 것이다. / 須(수) : 모름지기, 꼭. ~을 해야 한다. / 賣(매) : ~을 사다. / 溫暖食(온난식) : 따뜻한 음식.


開匣(개갑) : 지갑(紙匣)을 열다. ‘紙匣’은 현대 중국어의 ‘錢包(전포)’에 해당되는 한자어이다. / 還(환) : 다시, 또. / 贈(증) : ~을 주다. / 五萬圓(오만원) : 5만원. ‘圓’은 본래 1954년에 행한 통화(通貨) 개혁 이전의 화폐 단위의 하나로 1전(錢)의 100배를 가리키는 한자인데 여기서는 현재 통용되는 화폐 단위인 ‘원’의 대용어(代用語)로 사용하였다.


斯人(사인) : 이 사람. 원시의 ‘그 사람’을 한문식 행문(行文)에 맞게 변형시킨 말이다. / 匆匆(총총) : 총총히, 몹시 바쁜 모양. / 行己路(행기로) : 제 갈 길을 가다.



[한역의 직역]


역사(驛舍) 앞에는 흰 눈이 펄펄 내린다



“제발 저에게 커피 좀 사 주세요.”


노숙인의 목소리가 눈 속에서 들려온다.


때마침 신사가 있어 외투 벗어 주고


손에 끼고 있던 장갑 벗어서 전한다.


문득 말하길, “따뜻한 음식 사 드세요.”


지갑을 열어 다시 오만원을 건넨다.


이사람, 총총히 제 갈 길 가고


역사(驛舍) 앞에는 흰 눈이 펄펄 날린다.



[한역 노트]


이중열 시인의 위의 시는 1월 13일자 모 일간지 1면에 실린 사진과 그 사진에 대한 기사를 바탕으로 해서 지은 일종의 기록시(記錄詩)이다. 시인이 이 시를 짓고 역자가 이 시를 한역하게 된 데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었다.


1월 하순 어느 날 아침에 역자가 좌장으로 있는 시회(詩會)의 멤버이자 시인인 오수록 수사로부터 어떤 기사를 소개하는 메시지 하나를 받았는데 여기에서 마주한, ‘노숙인과 신사’라는 제목이 붙은 몇 장의 사진이 역자의 가슴을 오래도록 먹먹하게 하였다. 기사를 꼼꼼하게 읽어보고 있노라니 이 일은 충분히 시 감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퍼뜩 스쳤다. 곧바로 오수록 시인에게 전화를 걸어 ‘작시(作詩)’를 권하는 한편, 역자가 가입하고 있는 SNS 동호회에 이 기사를 소개하고는, “기사를 보고 한글시를 지어 올려주면 한시로 옮기기 적당한 시를 하나 골라 한시로 만들어 드리겠다.”는 약속을 하였더랬다. 그날 SNS 동호회에 올라온 시가 10편이 넘었고 역자가 보기엔 다들 상당할 정도로 훌륭하였다. 다만 대부분이 역자가 한시로 옮기기에는 다소 버거운 작품으로 보였기 때문에 되풀이하여 몇 번을 읽다가 마침내 이중열 시인의 위의 시를 한역해보기로 마음먹게 되었다. 그리하여 오늘 이 한역시를 소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중열 시인의 위의 시는 스케치와 같은 기법으로 사실을 적은 시이다. 기름을 뺀 보쌈고기처럼 담백한 이 시에는 시인들이 가끔 뿌리기도 하는 감정의 조미료 맛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이러한 경향의 시를 중국 전통문학에서는 ‘평담(平淡)’이라는 풍격(風格) 용어로 개괄하였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평이하고 담담하게 적었음에 그 풍경이 독자의 뇌리에 그대로 투사된다. 그 옛날 소동파(蘇東坡)가 설파한, 이른바 “시중유화(詩中有畵:시 속에 그림이 있다.)”인 셈이다. 그렇다면 기자가 찍은 사진은 말할 필요도 없이 “화중유시(畵中有詩:그림 속에 시가 있다.)”가 될 것이다.


한 장의 사진이 때로는 한 편의 시보다 더 시적이고, 한 편의 소설보다 더 많은 얘기를 들려줄 수 있다. 한 편의 시를 압도하는 한 장의 사진 앞에서 다시 시를 짓는 것은 만용이 아니라 애정일 것이다. 사진도 시도 기록은 역사가 된다. 그리고 기록 속의 민초들 일상도 역사가 되기에, 기자의 사진이 반갑고 시인의 시가 고마운 것이다. 초상권 문제가 있어 예의 그 사진을 여기에 소개하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쉽기만 하다.


이 시대의 힘 있는 자들은 왜 그 사진 속의 신사처럼 가슴 먹먹한 감동을 주지 못하는 걸까? 자리가 사람을 각박하게 만들지는 않았을 터인데, 저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그 사진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또 이 시를 본다면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가뜩이나 을씨년스런 가슴 들녘을 감동으로 적신 그 사진을 다시 보고 있자니 숱한 생각들이 들녘의 바람처럼 몰려온다.


아래는 오수록 시인이 병석에서 쓴 시이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어떤 질환으로 몇 달째 육신이 고통을 받고 있는 중임에도 훈훈한 미담을 소개하고 시까지 지어 보내주었으니, 이를 기록해 시인의 따스한 마음자리를 기념하는 것 또한 하나의 작은 역사가 될 것이다. 하여 이 자리를 빌어 오수록 시인의 쾌유를 빌면서 시 전문을 독자들께 소개하는 바이다.



훈훈한 세상을 여는 사람들



올 겨울은 유난히 추웠네


집집마다 수도가 얼고 한강도


얼었으니 노숙하는 사람들


고드름똥을 누었겠지



강추위에 언 몸을 녹이고 싶었던 서울역 집시


길 가던 신사에게 커피 한 잔 값을 구걸했다지



신사 양반 그에게 장갑을 벗어주고 외투를 입히고


신사임당 초상화 한 장 찔러주고는


눈보라 속으로 총총히 사라졌다지



비가 내리면 비를 찍고 날이


더우면 더위를 찍고 바람이


불면 바람을 찍던 신문기자



이번엔


선한 사람의 마음을 찍어주었다지



훈훈하여라!


선한 사람들이 떠받치는 세상



나, 이 한 장의 사진 앞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여기, 오래도록 서 있네



※ 4연 10행으로 된 원시를 역자는 8구의 칠언고시로 재구성하였다. 짝수구마다 압운하였으며 그 압운자는 ‘邊(변)’·‘傳(전)’·‘圓(원)’·‘前(전)’이다.


2021. 2. 2.


강성위 한경닷컴 칼럼니스트(hanshi@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