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현실의 산업정책 읽기] 경영학자 다윈이 말한다

출처 : 한경닷컴 > 뉴스 > 경제/금융
일자 : 2009년 1월 7일

안현실 <논설위원ㆍ경영과학博 ahs@hankyung.com>

다윈이 탄생한 지 200주년, ‘종의 기원’이 출간된 지 150주년이 되는 올해 모두가 ‘위기’와 ‘생존’을 말한다. 숱한 논쟁과 도전을 거치면서도 살아남은 진화론을 다시 펼쳐보게 하는 시대다.

생물계에서 진화 경쟁은 끝도 없다. 포식동물들이 더 빨리 달리면 그 먹잇감들은 더 나은 위장술로 대응하고, 이에 포식동물들은 후각이 더 예민해지는 방향으로 발전하면서 진화 경쟁은 피곤할 정도로 무한히 계속된다. 세상에 안전하고 안정적인 산업은 어디에도 없다. 변화 속도에 차이가 있을 진 몰라도 변화는 산업전반의 공통된 현상이다. 소위 경쟁우위라는 것이 생각만큼 오래가지 못하고 기업들의 수명이 짧아지는 것도 생물학자들 눈으로 보면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어느 기업도 갑자기 성장하다가 일순간 망해 버리거나, 성장도 없이 근근히 생명만 이어가는 그런 기업이 되길 원하지 않을 것이다. 진화론에는 복제를 잘하는 자가 복제된다는 원초적 원리가 있다. 생존과 복제, 기업으로 치면 견뎌내고 동시에 성장하라는 얘기다.

이것이 기업이 존재하는 목적이라면 진화론의 관점에서 볼 때 주주 중심주의니 이해관계자 중심주의니 하는 것은 잘못된 이분법일 뿐이다. 이익이 나지 않는 성장투자는 생존을 위협하는 것이고, 생존만을 위한 보수적 경영은 성장이란 목적을 저해할 것이기 때문이다.

생존도 하고 성장도 해야 한다면 전략도 이에 맞춰야 한다. 기존 사업에 집착하고, 단기적인 실행전략에 눈길이 먼저 갈 수밖에 없는 위기의 시대이지만 거대한 물결로 밀려오는 새로운 환경에 대한 ‘적응’과 ‘탐색’을 위한 실험과 투자를 멈추어서는 안 된다. 경영학자 다윈이 던지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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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 : 경제진화론
저자 : 유동운

마르크스와 다윈은 같은 시대를 살아간 사람이다. 마르크스는 다윈의 진화론을 ‘역사의 계급투장에 대한 자연과학적 토대’를 마련한 훌륭한 업적이라고 칭찬하면서, 다윈이 설명한 동식물의 기원과 자연선택으로부터 영감을 얻어 영국의 자본주의 사회가 분업, 경쟁, 신시장 개척, 발명, 맬서스의 생존경쟁등으로 가득찬 사회로 읽었다.

마르크스 사상의 기본적인 핵심은 생산력이 생산관계에 대항하여 싸우면서 궁극적으로 생산관계를 파괴하는 혁명적 과정을 그렸다는 데 있다. 그는 기술발전이 한 개인의 영감으로서만 간주되어서는 안되고 복잡한 역사적 과정이라는 점을 강조하여 기술변화에 대한 이론을 형성하는 데 크게 기여하기는 하였지만, 생산력이 어떻게 스스로 진화하는 가를 설명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마르크스의 사상이 경제 진화론의 사상을 공유한다고 볼 수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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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는 비록 다윈의 물질주의적인 이론에 매료되기는 하였으나 자연선택이라고 하는 다위의 이론을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그에 따라 사회경제의 변화가 진화하는 모습처럼 보여준다고 주장하더라도 이는 다윈의 이론에 따라 해석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다양한 개인들이 모인 집단 속에서 자연선택의 과정을 통해 다양한 진화가 일어난다고 하는 진화론적 사상은 역사를 계급투쟁에 얽매인 두 집단만이 충돌하는 현상으로 보는 마르크스의 견해와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가령 공산주의는 조화로운 상태에서 단일의 사회질서가 형성되는 것으로 믿는다. 이러한 상태에서 사회의 계급투쟁이 종식될 뿐만 아니라 소유권과 생산제도에서의 다양성도 소멸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를 추종했던 많은 공산주의 국가들은 이미 소멸되었다. 그나마 남아있는 몇몇 국가들도 이미 마르크스의 경제이론을 포기한 지 오래되었다. 이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생산이론이나 경제발전론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조리 실패한 것이다. 그들만의 생산이론이 없다는 것은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하는 것이고, 경제발전론이 없이는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은 아직 많다.

그럼 그들은 무엇을 하면서 지내나?

마르크스를 본받으면서 지내고 있다. 바로 자본주의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들, 특히 양극화를 가장 좋은 먹이라고 생각한다. 언제나 노동자는 자본가에 비하여 가난하다. 절대적인 관점에서 보면 노동자들은 마르크스가 생각하는 노동자보다는 훨씬 잘 살고 있지만, 상대적인 관점에서 보면 여전히 가난하고 착취당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물질적인 면에서는 노동자이지만, 지적인 면에서는 자본가인 지식노동자를 보면 그가 무어라고 말할 지가 갑자기 궁금해진다.

아담 스미스의 후예들은 상업자본주의 -> 산업자본주의 -> 독점자본주의 -> 수정자본주의로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지만, 아직 새로운 공산주의가 나왔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다. 지금도 자본주의의 위기라고 하지만, 마르크스가 기대하는 자본주의가 붕괴된 다음에 공산주의가 들어서는 것이 아닌 새로운 형태의 자본주의가 들어설 것이다. 왜냐하면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는 새로운 사회에 걸맞는 생산이론이라든가, 경제발전에 대한 새로운 견해가 없기 때문이다.

마르크스가 죽은 지 100년인 넘었고, 공산주의가 무너진지 20년이 넘었지만 아직 그의 후예들은 새로운 생산론, 경제발전론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 앞 길을 물어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들이 그토록 가진자와 못가진자, 노동자와 자본가의 투쟁과 혁명에 그토록 집착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들이 아는 한 그 두계급의 사이를 줄여줄 유일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100년전 마르크스가 한 이야기를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마르크스는 다윈을 좋아했다고 하지만, 다윈의 입장에서 보면 통탄할 노릇이다.

하기사 진화라는 것이 자연계에 항상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수억년째 진화하지 않은 채로 그 모습을 유지하는 동물들이 아직도 있기는 하다. 마르크스주의도 자체적인 생산론이나 경제발전론을 만들어내지 않고 스스로 진화하지 않으면서 살아남을 지도 모른다. 바로 그런 동물들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