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에 대학생 아빠가 자신의 7개월 된 아이를 60만원에 팔아넘긴 사건이 보도되면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더구나 아이의 몸값을 두고 흥정까지 했다니 더욱 기막힌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이런 일을 자행한 사람이 ‘대학교 1학년 학생’이라는 데에 더욱 충격이었다. 우리사회에서는 이미 청소년들의 성폭력 사건과 관련하여 원하지 않는 생명을 출산한 후 태아를 변기에 버리거나, 모텔에서 아이를 낳은 후 비닐봉지에 싸서 휴지통에 버리거나, 빌라 계단 아래에서 아이를 낳은 후 비닐에 싸서 계단 귀퉁이에 버리는 등, 말로 다 할 수 없는 일들이 이미 나라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다.

우리는 이미 경악을 금치 못할 ‘유아 사체유기(死體遺棄)사건’을 접하고 있는 상황이다 보니 어쩌면 이 사건은 그다지 놀라울 것도 아니라는 생각마저 든다. 정말이지 비극이다. 어쩌다가 우리 사회가 이렇게까지 되었는지 정말 고민이 아닐 수 없다. 나라의 미래라는 청소년들의 사고가 이렇게 변질된 데는 분명히 기성세대의 책임이 있다. 보여주지 못한 본이 있기 때문이다. 생명을 경시하는 풍토는 지독한 이기심에서 기인한다. 이기심은 자신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걸림돌이나 불편한 요소를 제거하고 싶어진다. 거기에 자신이 낳은 자식은 자기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불편한 인식이 더욱 끔찍한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데 이는 분명 기성세대의 산물이다.

그런 의식을 가진 사람은 그렇게 부모에게서 길러졌다. 이는 부인하고 싶은 진실이다. 개인의 인격이 존중받고 타인의 인격 또한 존중해 주어야 한다는 사고(思考)나, 모든 인간은 또 하나의 인격체로서 독립된 의지를 발현하며 살아 가야한다는 주체자로서의 의식을 인정받으며 길러졌다면 이러한 불편한 인식을 만들지 않을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失手)를 할 수 있다. 그것이 어떤 것이든, 의도하고 계획하고 준비한 실수는 없다. 의도된 악행이 아닌 이상 실수는 이해되어야 한다. 그것의 경중의 차이가 있다고 따지기 전에 그렇게 이해되고 용납해 주는 것이 필요하다. 이번 대학생 인신매매(人身賣買) 사건도 아마 전말을 알고 보면 실수에 의한 결과로 아이가 태어났을 것이다. 그래도 이 학생은 자신의 실수를 자인(自認)하고 어떻게 키워보려고 했던 것 같다.

그렇지만 대학교 1학년의 신분으로 가족과의 단절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사람으로 해서는 안 될 일을 생각했고 미래를 꿈꾸어야 할 젊은 나이에 전과자가 된 것이다. 저지른 행위만 보면 용서 못할 일을 저질렀다는 것은 자명(自明)한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는 결과만을 가지고 무조건 싸잡아 그를 몰아세울 수 없다. 지금의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었던 그 원인을 쫓아 올라가 보면 분명히 그도 피해자일 것이다. 만약에 부모가 자식의 잘못을 마음 아프게 생각하고 이성으로는 용서할 수 없지만 안타까운 마음으로 보듬어 주었다면 이런 결과를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 부모는 이러저러한 이유로 인해 그렇게 하지 못한 것 같다.

누구도 자신의 부모를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은 없다. 다만 자신에게 주어진 ‘부모라는 환경에 어떻게 적응하고 개척하느냐’ 하는 문제만 주어질 뿐이다. 그런 부모가 내 가족이 되고, 기성세대가 되어 꾸준히 그 영향력을 행세하며 살아가는 것이 사회라는 집단이다. 우리 사회에서 자행되고 있는 폐륜적 일들(존속살해, 존속폭행, 사채유기, 방임. 등)은 우리 모두의 책임이고 우리 모두가 관심을 갖고 살펴봐야 할 우리 사회의 문제인 것이다. 질타(叱咤)는 누구나 할 수 있다. 사실 질타처럼 쉬운 일은 없다. 하지만 의식 있는 우리는 질타에 앞서 벌어진 상황의 원인을 들여다보고 과연 나는 잘 살아가고 있는지, 함께 살아가고 있는 이 사회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지 스스로 고민해 봐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