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여년 전 나는 나에게 속한 모든 것을 놓아야만 하는 어쩔 수 없는 절박한 상황에 맞닥뜨린 일이 있었다. 그 상황에서 나는 내 목숨 하나 내려놓는 것은 차라리 쉬웠다. 내 마음 하나만 돌려 먹으면 될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 나의 애간장을 녹이듯 고통스러운 것은 나의 책임과 관련된 일이었다. 나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그 무엇! 그것은 나로 하여금 피를 토할 것 같은 오열을 경험하게 했고 정말이지 그 일 하나만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시간을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었다.

법정스님은 ‘무소유’를 이야기 하면서 자신의 방에 있는 ‘난초’를 빗대었었다. 법정스님의 의도를 모르는바 아니지만 내가 내려놓아야 할 것이 차라리 ‘난초’라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사람들은 세상을 떠나면서 유서를 남긴다. “남아 있는 가족들에게 미안하다” 책임에 대한 미안함이다. 또한 사람들은 자신이 목표한 어떤 일이 잘 못 되었을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이 가족이다. 책임이다. 책임을 진다는 것은 도리고 의무고 부담이다. 그 책임을 다 하기 위해서 우리는 자신을 그 어떤 것들에 올가미를 씌우고 자신을 가두고, 절제시키고, 순종을 강요한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이야기 한다. 모두가 그렇게 살고 있다고

그렇기 때문에 힘들어 해서도 안 되고, 눈물을 보여서도 안 되고,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잘 견뎌내야 한다고 서로에게 최면을 건다. 칸트의 논술에서 거론 되고 있는 주체적 의미로서의 ‘귀책(Zurechnung)‘에 우리 스스로를 옭아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자주적인 노력이 없다면 이 사회는 아마도 ’혼란‘ 그 자체일 것이다. 모두가 자신의 책임을 등한시 하고 오직 자신만 생각한다면 가정도, 집단도, 사회도, 또한 국가도 온전히 존재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무소유’는 ‘욕심’과 ‘집착’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하지만 가족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자신의 맡은 바 소임을 다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기본적인 소양이다. 나는 그러한 생각마저 ‘소유’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다만 그것들에 대응하는 마음의 문제는 우리가 고민해 봐야할 심성이다. 우리가 그것들을 대함에 있어서 과연 자신의 욕심에 근거하는지 아니면 집착과 관계하는지는 혹은 자신의 책임에 의한 것인지는 우리가 필히 살펴봐야할 심성이다.

인간은 어차피 혼자다. 세상에 나올 때도 혼자 나왔고, 세상을 떠날 때도 혼자 간다. 살아 있으므로 관계를 형성하고, 살아 있으므로 책임을 다한다. 하지만 오늘 자신이 자기의 자리를 박차고 떠나야 할 때 과연 내게 남는 미련, 내게 남는 애착은 무엇인지 고민해 봐야한다. 그것이 무엇이든 ‘미련’과 ‘애착’은 ‘집착’에 근거한다. 그러므로 오늘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하며 살다가 지금 이 세상을 떠난다 해도 가벼운 마음으로 모두 내려놓을 수 있다면 그 삶이야 말로 ‘무소유’의 삶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