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둔산 올라 춘설에 넋을 놓다.
어스름이 채 걷히지 않은 이른 새벽, 집문을 나선다.
가느다란 빗줄기가 가로등 불빛에 번뜩인다.
하늘을 향해 손바닥을 폈다. 이슬비 수준이다.
재킷에 붙은 모자를 뒤집어 쓴 채 10분 거리 전철역까지 바삐 내달렸다.

06시 40분, 이미 사당역 1번 출구는 초만원이다.
그 사이 빗발은 세졌다. 사람들은 비를 피해 출입구 처마밑으로
빼곡히 모여 들어 드나들기가 힘들만큼 매우 혼잡했다.
도로 위도 매한가지, 전국 산으로 향하는 산악회 버스와
지방 예식장으로 떠나는 버스 그리고 택시들이 뒤엉켰다.

교통경찰은 아침부터 온갖 험언 들어가며 교통 정리하느라 진땀을 빼는 모습이다.
차 좀 빼달란 경찰의 협조에 너나없이 언성 높여 반응한다.
공무 중인 경찰에게 이렇게 막 들이밀어도 되는 나라?
언제부터 이 지경이 되었는지, 기가 찰 노릇이다.

비맞은 생쥐꼴로 보도를 오가며 허둥대다가 가까스로 버스에 올랐다.
서울을 빠져 나가려는 차들로 주말 고속도로는 늘 몸살이다.
그러나 전용차선에 들어선 버스는 제 속도 다 내며 쭉쭉 내달린다.

봄비 내리는 고속도로, 차륜 마찰음이 귓청을 울린다.
윈도우브러쉬 움직임도 숨가쁘다. 조금 내리다 말 것 같지가 않다.
스맛폰을 꺼내 오늘 산행지인 ‘대둔산’ 날씨를 검색했다.
오후까지 비 올 확률 90%란다. 우중산행은 따 놓은 당상이다.
대둔산 올라 춘설에 넋을 놓다.
금방이라도 억수를 쏟아낼 것처럼 창밖은 어둑하다.
습기가 차오른 차창을 손으로 쓰윽 문질렀다.
창밖이 하얗다. 순간 눈을 의심했다.
죽암휴게소 쯤에서 비는 진눈개비로 바뀌더니 대전을 지나면서부터
산야는 때늦은 흰눈으로 뒤덮히기 시작했다.

오늘은 4월 하고도 20일, 봄비가 내려 백곡을 기름지게 한다는 절기,
‘곡우(穀雨)’가 아니던가.
우중산행 걱정은 엉뚱하게도 춘설산행 설렘으로 바뀌었다.

캡틴이 마이크를 잡고서 멘트를 날린다.
“애초 계획했던 코스는 현지 기상 사정 상 무리일 것 같다.
최단코스로 정상인 마천대에 올랐다가 원점회귀하는 것으로 바꾸겠다”며,
“아마도 지금 아이젠을 휴대한 분들 거의 없으리라 본다.
예상치 못한 폭설로 등로가 매우 미끄럽다. 안전사고가 염려되니
가급적 케이블카를 이용하여 워킹시간을 줄일 것”도 당부했다.
대둔산 올라 춘설에 넋을 놓다.
버스는 대둔산 관광지구 주차장에 이르러 산객들을 토해냈다.
봄산행 나섰다가 때아닌 설산을 만난 산객들의 표정이 벙벙하다.
봄비 맞으며 버스에 올랐는데 내려서니 춘설이라..
봄을 시샘한 겨울이 심술을 부려 잠시 시간을 되돌려 놓은게다.
대둔산 올라 춘설에 넋을 놓다.
대둔산 올라 춘설에 넋을 놓다.
시들해지던 벚꽃 위로 올라 앉은 눈송이는, 흐드러진 벚꽃으로 환생하고…
노란 개나리에 핀 눈꽃은, 무심한 장승마저 놀래켜 눈을 부라리게 하고…

봄눈 치고는 생각보다 적설량이 장난 아니다.
보름 전쯤 배낭 속 겨울 장구를 꺼내 수납해 뒀다.
눈 쌓인 가파른 산길을 아이젠도 없이 고집스레 오를 이유는 없다.

물론 아이젠을 휴대한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곰곰히 생각해 봤다.
저들은 준비성이 철두철미한 것인가, 아니면
줄곧 넣고 다니다가 봄맞이 배낭정리를 미처 못한 것인데
용케도 ‘소 뒷걸음질 치다 쥐 잡은 꼴’은 아닐까?
비아냥이 아니라 부러워서 하는 소리다.
대둔산 올라 춘설에 넋을 놓다.
7부능선까지 기계의 힘을 빌리기로 했다.
대부분 생각이 같았을까, 때아닌 춘설에 산객들은 케이블카를 택했다.
내키진 않았지만 콩나물시루 같은 박스에 실려 7부능선까지 이동했다.
대둔산 올라 춘설에 넋을 놓다.
7부능선에 이르자, 봄은 완전히 실종됐다.
타임머신을 타고 겨울로 되돌아 온 것이다.
대둔산 올라 춘설에 넋을 놓다.
대둔산 올라 춘설에 넋을 놓다.
대둔산 올라 춘설에 넋을 놓다.
대둔산의 산세는 자욱한 눈안개에 갇혀 가늠할 수가 없다.
그 아쉬움을 춘설진경이 대신하고 있다.
단애와 흐드러진 눈꽃 사이로 난 철계단을 올라서니
협곡을 잇는 구름다리가 아찔하게 눈에 든다.
구름다리에 섰다. 흔들림이 전해진다. 기분 별로다.
발아래를 내려다 봤다. 머리가 띵하고 오금이 저리다.
참고로, 놀이기구 절대 못타는 특이체질이다.
대둔산 올라 춘설에 넋을 놓다.
구름다리를 건너 다시 가파른 돌계단을 힘겹게 올라서면 쉼터다.
이곳에서 간단한 요기를 할 수가 있다.
울퉁불퉁 미끌미끌, 돌계단을 딛고 오르기가 위태위태하다.
두고 온 아이젠이 이렇게 그리울 수가 없다.

삼선봉으로 가는 길목 안부에 세워진 ‘동학군 최후 항전지’임을 알리는
안내판이 가던 발걸음을 멈춰 세운다.
대둔산 올라 춘설에 넋을 놓다.
“이곳은 동학농민혁명 당시 전봉준, 김개남 장군이 체포된 직후
투항을 거부하고 동학 ‘접주’급 이상의 지도자 25명이 이곳으로 피신,
요새를 만들어 일본군과 3개월에 걸쳐 최후의 항전을 벌이다가
1895년 2월 18일, 소년1명을 제외한 전원이 장렬하게 순국한
역사의 현장이다”라고 쓰여져 있다.
대둔산 올라 춘설에 넋을 놓다.
여기서 왼쪽으로 돌아 오르면 마(魔)의 ‘삼선계단’이 막아선다.
조금 전 지나온 구름다리는 이에 비하면 맛뵈기란다.
지레 머리가 지끈거린다. 하지만 마천대로 가는 일방통행 외길이다.
계단은 코를 박고 올라야할 만큼 곧추섰다.
경사 51도로, 차라리 사다리라 함이 옳다.
가파른데다가 폭 마저 좁아 36미터를 오르는 동안, 아래를 내려다 볼 수도,
뒤를 돌아다 볼 수도 없었다.
(물론 느낌은 사람마다 다르다. 이건 순전히 내 경우)
대둔산 올라 춘설에 넋을 놓다.
그렇게 조심스럽게 걸음하며 춘설에 취해 마천대(878m)에 닿았다.
대둔산 최고봉인 마천대에 서면 시야가 툭 터져 거칠게 없다 했다.
그러나 한꺼번에 모든 걸 다 내보일 순 없는지, 조망은 눈안개 뒤로 숨었다.
오늘은 아마도 춘설진경을 스페셜로 준비한 모양이다.

정신줄을 놓은 날씨 덕분에 ‘곡우’에 ‘춘설’을 만끽했지만
숯검정이 되어 있을 農心을 생각하면 조심스럽다.
대둔산 올라 춘설에 넋을 놓다.
대둔산은 충남과 전북 그리고 3개 시군(논산, 금산, 완주)에 걸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