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덮힌 겨울산은 시간이 정지된듯 고요하다.
이따금 산자락을 휘감는 칼바람에 눈꽃이 부스러져 내려 시간이 흐르고 있음을 안다.
돌계단도 나무계단도 너덜지대도 눈 속에 묻혀 도무지 눈가늠이 쉽지 않다.
골바람에 쓸린 눈은 된비알 조차 만만하게 보일 만큼 高低를 흐트려 놓는다.

침묵해 있는, 정적에 휩싸인 겨울산은 보이는 것처럼 안온하지만은 않다.
톱날 암릉구간은 무딘 것처럼 보일 뿐이며,
울퉁불퉁 산길은 부드러움으로 가려져 있을 뿐이다.
이처럼 겨울 눈산행은 도처가 함정이다. 그만큼 돌발변수도 많다.

그러나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산 마니아들은 겨울산을 즐긴다.
겨울 눈산을 앞장 서 헤쳐 나가는 것을 전문용어로 ‘러셀(Russel)’이라 한다.
러셀이 되어 있지 않은 겨울 산길은 위험천만이다.
누군가 앞장 서 눈길을 터야 한다.
위험요소를 잔뜩 감춘 순백의 은빛능선은 만만하게 보여서인지
초보자가 앞장 서다가 낭패를 당하는 사례도 종종 접하게 된다.
이처럼 심설산행 경험이 일천한 사람이 러셀을 하다간 큰코 다치기 십상이다.
러셀산행 有感
러셀산행의 선두는 첫째로 겨울 산행경험이 풍부해야 한다.
적설상태와 지형, 그리고 설질을 파악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무릎 이상으로 빠지는 경우에는 무릎으로 다진 다음 발을 딛는다는 사실도,
눈덮힌 급경사를 오를땐 지그재그로 올라야 한다는 등 기초적인
러셀상식도 갖추는게 안전한 심설산행의 요령이다.

둘째로 용기도 있어야 하며 배짱도 두둑해야 한다.
뒤따르는 이들의 안전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는 절대 희생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셋째로 판단력과 결단력도 남달라야 한다.
때로는 바람에 실려 온 눈이 거대한 벽이 되어 가로막기도 한다.
시간 지체로 인해 더 나아 가다간 어둠과 맞닥뜨릴 경우도 생긴다.
이럴 경우 지체없이 우회하거나 가던 길을 접고 탈출로로 내려딛는
판단과 결심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넷째로 강건한 체력과 함께 체력을 안배할 줄 알아야 한다.
무릎까지 빠지는 눈산행 시 시간과 체력은 두배 넘게 소모된다.
평상시보다 보폭도, 동작도 최대한 줄여야 한다.
또한 경험있는 여러명이 번갈아 가며 러셀을 해야 한다.
체력만 믿고 과욕하거나 독주하는 것은 사고에 이르는 지름길이다.
이 모두를 지키고 따를 때 비로소 눈산은 길을 열어준다.

연말 분위기는 대통령 선거 유세차량의 소란스러움에 묻혀 버렸다.
이따금 땡그렁거리는 자선냄비 종소리만이 연말임을 알리고 있다.
정치판은 대선을 코 앞에 두고 온갖 선물 보따리를 풀어 보이지만
늘상 때만 되면 들고 나오는 것들이라 팍팍 와닿질 않는다.

추락하는 원·달러 환율은 날개가 없어 보인다.
원달러 환율의 마지노선으로 여겨졌던 1080원선이 붕괴되기도 했다.
급락세가 너무 가파르게 진행되면서 많은 중소기업들이 수출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를 지경이다.

원·달러 환율 급락의 악조건 속에서도 우리나라 무역 규모는 2년 연속
1조 달러를 기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국민들 표정은 그리 밝지만은 않다.
열심히 일해 금자탑을 쌓았지만 곳곳에 여전히 암초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심설산행시 선두가 러셀을 해야 뒤따르는 일행이 안전하게 오르듯
무릇 정치 지도자들이라면 무겁고 힘들어 하는 국민들의 가슴을 보듬어 가며
선두에 서서 난국을 헤쳐 나가는 지혜를 발휘해야 함이 마땅하다.

러셀산행시 초보자가 과욕 부리며 독주하다간 본인은 물론이고
뒤따르는 모두가 낭패를 당하게 된다.
러셀 경험이 없는 선두를 따르다가 예상시간이 지체되어
산 속에서 어둠을 맞게 될른지도 모른다.
일행들의 안전을 위해 러셀을 하는 선두는 경험과 용기와 판단력과 결단력,
그리고 강인한 체력이 요구된다.
이 모두를 적절히 안배하며 조율할 줄 아는 리더가 진정한 선두다.

대선 후보자들, 하루쯤은 심산에 들어 러셀산행을 해보는 건 어떨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