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라고 부르기엔 웬지 어색하다. 거꾸로 엄마를 ‘어머니’라고 부르기 좀 그렇듯. 우리들 아버지는 대개 좀 무거운 느낌이다. 가부장적 문화의 책임자로서 때론 과묵하고 때론 엄격하다. 그러나 우리 아버지들은 위대한 정(情)을 보여주셨다. 우선 나랑사랑으로 한국 현대사를 이끈 산업의 역군이시다. 지독한 자식사랑은 자식들에게 가난만큼은 물려주지 않기 위해 스스로 워커홀릭(WORK HOLIC: 일 중독자)이 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규모의 경제 시대와 맞물려 진행된 처절한 아버지의 희생으로 나라는 재건되고 우리는 그 덕에 오늘날 가히 ‘웰빙’이라는 말을 꺼내 쓰게 되었다. 그저 묵묵히 지금의 풍요를 위해 헌신하신 울 아버지들의 속정(情)에 감사할 따름이다.

울 아버지도 여느 아버지와 크게 다르지 않다. 전형적인 무뚝뚝 경상도 사나이지만 보편적 울 아버지들처럼 온정을 소유하신 분이다. 시골에서 농사일을 하시다가 자식들 공부 때문에 어머니와 무작정 상경하여 맨주먹으로 시작, 4남2녀 모두에게 최적의 교육기회를 제공하셨다.

살아오면서 정의로운 원칙에 어긋남에는 매서운 질책을 가하고 평소 장문의 대화가 전혀 없던 아버지에게 친근감을 갖기란 비교적 어려운 일이었지만 돌이켜 보면 비언어적 행동에서 누구보다도 자상한 아버지 였던 점은 분명하다.

지금은 흔해 빠졌지만 가난한 어린시절 구경조차 힘든 바나나를 서울 출장길에 올라 기어이 구해오신 울 아버지.
아주 가끔 회초리를 들고 나서 자고 있는 동안 퉁퉁 불은 종아리를 가만히 주물러 주신 울 아버지.
배탈 또는 몸살이 난 자식의 고통을 밤을 세워 함께 마음으로 앓아주고 군대간 자식에게 맞춤법 엉망, 필체 엉망인 친필 편지를 정성들여 편지지에 써서 보내주신 울 아버지.
명절날 고생하는 며느리들의 벽에 걸린 옷가지에 슬쩍 꼬깃꼬깃 쌈지돈을 넣어놓으신 울 아버지.

소박하고 평범하지만 똑같이 위대한 우리들 아버지의 자화상이다.

그래서…… 미리미리……. 그 고마움과 배려해 주심을 알고 더 더욱 효도해야 하는게 이제 그러지 못하는 현실이 되고 말았다.

아버지의 부음(訃音)에서야 울 아버지의 사랑을 알고 효를 찾는다.



樹欲靜而風不止 子欲養而親不待

“나무는 조용하고자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아니하고

자식이 봉양하려고 하나 어버이는 기다려 주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