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문화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가 쓴 ‘국화와 칼’은 일본 연구자들에게 고전으로 통한다.1946년 발간 후 60여년이 지났지만 ‘일본인’의 특성을 이만큼 훌륭하게 파헤친 저서는 드물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국화와 칼은 국화를 가꾸는 데 온 힘을 쏟을 정도로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민족인 동시에 칼(무력)을 숭배하는 일본인의 이중성을 상징한다.세계 최강 미국에 맞서 전쟁을 치른,무모하면서도 치밀한 일본인의 특성을 객관적으로 잘 분석했다.
지난 8일 개막된 베이징올림픽에서 세계 강국들은 ‘스포츠 전쟁’을 벌이고 있다.각국이 자존심을 내걸고 국력을 쏟아 펼치는 스포츠 경쟁은 ‘총성없는 전쟁’이다.주최국 중국에 이어 아시아 2위 자리를 놓고 벌어지는 한국과 일본 간 메달 쟁탈전도 뜨겁다.
한국 선수들의 잇따른 승전보에 묻혀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지만 올림픽 기간 중 한국 경제의 실상을 보여주는 뉴스도 적지 않았다.
광복절인 지난 15일 관세청은 올들어 7월까지 대일 무역적자가 201억3601만달러로 전년 동기대비 17% 증가했다고 밝혔다.대일 무역적자는 올해 사상 처음으로 300억달러를 넘어설 전망이다.
일본에서 수입한 품목은 기계류와 정밀기기,화공품 등의 순이었다.한국이 완제품을 만들더라도 원료와 부품을 일본에 의존하는 취약한 산업구조를 반영한다.그래서 한국이 세계 최고 경쟁력을 자랑하는 휴대폰 반도체 조선 등도 일본산 부품이 없으면 만들 수 없다는 얘기가 나온다.
대일 적자가 갈수록 악성으로 바뀌고 있다는 뉴스도 있었다.2000년대 들어 소비재 수입이 급증하고,서비스수지 적자폭은 빠르게 확대되고 있다.
올 7월말까지 일본산 소비재 수입은 25억달러로 40%나 늘어났다.애주가들 사이에 일본술 마니아들이 늘어나면서 사케(일본술) 수입이 급증하고 있다.또 주부들 사이에선 기저귀부터 간장 샴푸까지 일제가 인기를 끌고 있다.
글로벌 시대를 맞아 소비자가 좋은 물건을 사는 게 문제가 될 건 없다.하지만 경상적자 급증으로 외환위기설까지 나도는 마당에 일본산 소비재 수입까지 폭증하는 것은 아무래도 지나치다는 생각이다.
더욱이 독도나 교과서 문제 등 한일 간 정치 외교 이슈에 대해선 사사건건 핏대를 올리는 정치인이나 국민들이 국가 생존에 심각한 영향을 주는 대일 경제 의존도 심화 현상에 대해 무관심하다는 것은 우려스러운 일이다.
일본은 한국시장을 뚫기 위해 철저하게 준비해왔다.김대중 정부 때 단행된 한일 문화시장 개방과 2002년 한일 월드컵 공동 개최 이후 민간 차원의 교류 확대를 계기로 이미지 개선 작업을 꾸준히 펼쳐왔다.
그들은 ‘일본산 제품’은 품질이 좋으면서 가격도 한국산과 큰 차가 없다는 점을 한국 소비자들에게 각인시키는 데 성공했다.반면 한국산 제품은 연예인들의 반짝 인기에 의존한 결과 ‘한류’가 시들해진 지금 일본에서 설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광복절’이냐 ‘건국절’이냐의 명칭 문제를 놓고 여야가 대립했던 지난 15일 일본을 대표하는 신문인 니혼게이자이신문은 ‘건국 60주년을 맞은 한국의 고뇌’라는 사설을 실었다.실용주의를 내세운 기업가 출신 대통령이 등장했지만 정치 경제 사회 모든 분야에서 한국이 10년 만에 최대 위기를 맞았다는 지적이었다.
올림픽 축제가 끝나면 국민들은 침체에 빠진 세계 경제의 냉엄한 현실과 다시 맞닥뜨리게 된다.각국에서 ‘경제동물’이라고 비아냥을 듣기도 하는 일본을 그대로 따라할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경제만큼은 치밀하고 철저하게 미래를 준비하는 일본으로부터 배울게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