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가을 소요산에 들어, 원효를 기리다.
전형적 회귀산행코스인 동두천 소요산의 산줄기를 따라 오르며 요석공주와 원효대사를 생각합니다. 원효가 요석공주와의 파격적 스캔들(?)로 파계한 것은 그의 나이 40세 무렵이었다고 삼국유사는 전합니다. 즉 태종무열왕 재위시기인 654년부터 660년 사이의 일입니다. 원효는 길거리로 나와 노래했습니다.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내게 빌려주면 하늘을 떠받칠 기둥으로 재목을 낳을 것이니”
누구도 이 노래에 담긴 뜻을 알지 못했으나 태종은 눈치를 챘다 합니다.
“저 스님은 부인을 얻어 아들을 낳아 큰 재목을 만들고자 하는구나” 라고 생각한 태종은 宮吏를 시켜 원효를 찾아 요석궁으로 들게 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원효와 과부였던 김춘추의 둘째 누이 요석공주의 만남이 이루어졌고 부부의 연으로 이어졌습니다.

원효는 요석공주에게 자루 없는 도끼, 즉 옥문(玉門)을 빌려달라고 하여 하늘을 떠받칠 기둥, 즉 자신의 ‘물건’으로 잉태하였으니 그가 바로 ‘설총’입니다.
그러나 부부의 연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속가의 연은 늘 부처님의 가르침에 걸림돌이었습니다. 결국 홀연히 속세를 등지고 수행의 길을 찾아 나섰습니다.  심산유곡을 돌고 돌아 둥지를 튼 곳이 바로 소요산이었습니다.
초가을 소요산에 들어, 원효를 기리다.
소요산역을 나와 10분 걸으면 소요산 자재암 주차장입니다. ‘틀을 벗어난 자유’라고 쓰여진 현수막이 곳곳에 내걸렸습니다. 불교방송이 후원하는 ‘경기북부음악예술제’입니다. 이곳 자재암 광장에서 오늘 열립니다. 무대설치와 객석 의자 준비로 분주한 모습입니다.
초가을 소요산에 들어, 원효를 기리다.
초가을 소요산에 들어, 원효를 기리다.
일주문을 지나 그윽한 숲그늘길을 따라 20여분 걸어 속리교를 건넙니다. 속세를 떠나 피안의 세계로 접어든다는 속리교이지요. 자재암과 공주봉으로 길이 갈라집니다. 시계 역방향으로 원점회귀하기 위해 공주봉 쪽으로 발길을 옮깁니다.

계류를 건너 풀숲 무성한 너른 터, 옛 절터를 지나자 이내 빡센 오름길이 이어집니다. 모자챙을 타고 흐르는 땀방울이 연신 신발코를 적십니다. 산새들의 지저귐이 반갑습니다. 저 산새들은 요석공주의 化身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초가을 소요산에 들어, 원효를 기리다.
초가을 소요산에 들어, 원효를 기리다.
숲이 열리면서 데크가 펼쳐집니다. 요석공주가 머물던 산봉우리, 공주봉(526m)입니다. 깎아지른 벼랑 아래로 동두천 시내가 한 눈에 들어옵니다. 소요산 전 구간에 걸쳐 등로를 정비하느라 어수선합니다. 공주봉 한켠에 등로 보수를 위해 옮겨놓은 자재 위에 쓰레기들을 버려 볼썽사납네요. 데크에 기대어 잠시 숨을 고른 다음, 소요산의 주봉인 의상대로 향하며 다시 원효를 떠올립니다.

수행정진을 위해 요석공주와 아들 설총을 경주에 남겨 두고 길을 나선 원효, 다시 못볼지도 모르는 원효를 떠나 보낸 요석공주, 그 애틋함이 골골마다 묻어납니다. 원효가 떠난 빈자리는 너무나 컷겠지요. 얼마 후 요석공주는 설총을 데리고 소요산으로 찾아 듭니다. 바위벽이 내려다 보이는 건너편 산중턱에 별궁을 지어 원효가 수행하고 있는 바위벽 쪽을 향해 조석으로 절을 올립니다. 그 바위벽이 원효대, 그 폭포가 원효폭포로 지금도 쉼없이 물줄기를 쏟아붓고 있습니다.
초가을 소요산에 들어, 원효를 기리다.
원효가 수행하던 토굴로 비에 젖은 여인이 뛰어 들었습니다. 젖은 옷속에 드러난 뽀얀 살결, 그리고 해맑은 미소에 원효의 가슴은 방망이질 합니다. 옷이 젖어서 말려야겠다며 아예 저고리를 벗고 있었습니다. 눈을 감습니다. 날은 이미 저물어 어둑해져 오는데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수도자를 앞에 두고 이 무슨 행동이오?”
“수도자의 눈으로 여자를 보면 여자가 아닌 수도자로 보인다 하옵니다”
그리고선 긴 침묵이 흐릅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원효로서는 가장 긴 밤이었습니다.

새벽녘까지 좌선을 하고 있다가 동이 트자, 차디찬 폭포수에 몸을 던졌습니다. 여인도 폭포수로 뛰어 듭니다. 원효는 무심하게 폭포수를 맞으며 말했습니다.

心生則種種法生 心滅則種種法滅 自在無碍

마음이 생김에 온갖 법이 생기는 것이며, 마음이 사라지면 온갖 법 또한 사라지는 것이요. 나에게는 자재무애의 참된 수행의 힘이 있소이다.

그런데 참으로 기이한 현상이 벌어졌습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맨몸으로 살포시 미소짓던 여인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제서야 원효는 무릎을 탁 쳤습니다. 그 여인은 원효의 수행을 시험해 보기 위해 나타난 관음보살이었던 것입니다. 원효는 그 자리에 절을 짓고 서슴없이 자재암이라 명명하였습니다. 이후 더욱 정진하여 “모든 일은 마음이 만들고 마음에 따라 생긴다”는 일성을 남기기도 하였습니다. ‘一切唯心造’는 원효대사의 깨달음의 결정체라 할 수 있습니다.
초가을 소요산에 들어, 원효를 기리다.
초가을 소요산에 들어, 원효를 기리다.
초가을 소요산에 들어, 원효를 기리다.
암봉으로 이루어진 의상대(587m)에 올라 지나 온 공주봉과 가야 할 산봉들을 눈에 담습니다. 원효와 요석공주의 애틋한 사연이 소요산 6봉 골골마다 녹아 들어서일까, 여느 산들과는 또다른 느낌입니다.
의상대를 벗어나 노송을 끼고 돌아, 날카롭게 솟구친 암릉을 조심조심 디뎌 숲속 바위턱에 배낭을 내렸습니다. 땀을 많이 흘렸기에 챙겨넣은 막걸리 한 통을꺼내 원기를 끌어올리니 거짓말처럼 금새 뱃심이 생깁니다.
초가을 소요산에 들어, 원효를 기리다.
초가을 소요산에 들어, 원효를 기리다.
초가을 소요산에 들어, 원효를 기리다.
상백운대로 향합니다. 소요산 등로 중 백미라 할 수 있는 칼바위 능선길을 맞닥뜨리게 됩니다. 칼바위 틈을 비집고 뿌리를 내린 노송들의 강인한 생명력에 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오밀조밀 솟구친 칼바위 능선을 장애물코스 통과하듯 조심조심 타고 넘습니다.
초가을 소요산에 들어, 원효를 기리다.
그렇게 상백운대(559m)를 찍고 중백운대(510m)를 지나 하백운대(440m)에 이르게 되는데 여기가 막다른 능선길이지요. 자재암을 가리키는 푯말을 따라 내려서니 여기도 로프를 설치하는 공사가 한창입니다. 난코스인 까칠한 직벽인데 로프나 난간이 설치되어 있어 비교적 안전한 편입니다. 자재암을 들머리로 소요산을 오를 경우 숨이 턱끝까지 차오르는 마의 구간이기도 하지요.
초가을 소요산에 들어, 원효를 기리다.
자재암(自在庵) 앞마당에 이르러 샘물로 목을 축이며 원효의 음성에 귀 기울여봅니다.

“마음이 자재하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는 것을…”
초가을 소요산에 들어, 원효를 기리다.
직벽을 타고 떨어지는 폭포수는 커다란 소(沼)로 곤두박질 치며 포말을 일으킵니다. 하얗게 부서지는 포말에 원효와 요석공주가 어른거립니다. 그렇게 피안의 세계를 유유자적 노닐다가 다시 속리교를 건너 속세로 되돌아 왔습니다
초가을 소요산에 들어, 원효를 기리다.
일주문을 통과해 구절터-공주봉-의상대-나한대-칼바위능선-상백운대-중백운대-하백운대-자재암-일주문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