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치는 것은 비즈니스가 아니다(Teaching is not a Business.)” 라는 주제의 칼럼(David L. Kirpaug)이 2014년 8월 16일자 뉴욕 타임즈(NYT)에 실렸다.

내용인즉 –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 오늘날의 교육개혁자들은 학교 교육이 무너지고 있으며, 비즈니스가 그의 치유를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고 믿는다는 것이다. 경쟁을 기반으로 하는 파괴적인 혁신과 인터넷 강의, 시장원리와 기술의 혁신이 인간교육을 대체하고 있는 바, 필자는 이에 대한 우려와 함께 교육의 근본원리에서 벗어나지 말 것을 주장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좋은 교육의 본질은 자질을 갖춘 선생님과 흥미롭게 참여하는 학생, 도전적인 교과목 등이 함께 어우러져야 한다는 점이다. 당연하고 지당한 주장이다. 오죽하면 세계 최고의 교육 시스템을 자랑하는 미국에서 교육의 현실적인 문제를 거론했겠는가 생각해 본다.

최근 자사고와 일반고에 대한 교육 관계기관의 갈등, 교사와 교육행정 당국과의 대립, 학교교육 과정과 기업의 요구가 일치하지 않는 문제점, 인문학과 이공계의 경계에서의 혼란 등에 대한 갑론을박(甲論乙駁)이 심해지고 있다. 최근 논쟁의 흐름을 살펴보면, 수 많은 논란 가운데 정작 중요한 “인간을 왜 가르쳐야 하는가?”에 대한 논의는 무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을 왜 가르쳐야 하고, 무엇을 어떻게 교육시켜야 하는가에 대한 논리가 삭제된 채, 취직과 성적에만 집중되고 있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복잡한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을 갖고 살아 갈 수 있는 창의적인 인재가 되려면, 국어와 영어, 수학만 잘하는 재주꾼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오랫동안 행복한 삶을 유지하고, 성공적인 인생을 살기 위해 필요한 역량에는,

– 해보지 않은 일에 과감히 도전할 수 있어야 하는 정신,
– 처음 만난 사람에게 다가가 친절히 인사를 건네며 웃어 줄 수 있는 배려,
– 유혹과 유행에 휩쓸리지 않을 수 있는 통제력,
– 아름다운 음악을 듣고 그림을 바라보며 만면에 웃음을 지을 수 있는 정서적 안정,
– 하기 싫은 일을 해낼 수 있는 인내심,
– 혼자서 외롭지 않을 수 있는 맑은 영혼 등이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그런 사람을 기르기 위해서는 초등학교에서 대학에 이르기까지의 교육과정에 음악과 미술, 체육과 도덕 교육, 역사와 철학 등이 고르게 분포되어야 한다. 역사 교육에 있어서도 국가의 정체성에 관한 혼란을 부추길 것이 아니라, 사실을 근거로 한 예술의 역사, 철학의 역사, 전쟁의 역사, 음악의 역사 등 다양한 내용을 함께 가르쳐야 한다. 국가의 발전과정에서 일어난 어느 한 가지 전쟁이나 어느 위인이나 지도자에 대한 사상에만 국한하여 다루는 역사교육은 올바른 게 아니다. 거기엔 배경과 이유와 근거가 모두 다를 수 있으므로 어렵더라도 상세한 설명이 따라야 한다.

또한 인간교육은 가정에서의 부모교육과 사회에서의 준법 교육, 올바른 가치관 정립을 위한 윤리교육 등이 어우러져야 한다. 기업에서도 임직원을 대상으로 교육내용을 설계하고 진행하는 과정에서 단순한 기술(Skills or Tactics) 교육이나 방법과 전략(Methodology or Strategy)만 가르칠 게 아니라, 역사와 경영학이 접목되고 철학과 경영윤리가 연결된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어렵고 지루한 인문학이나 이론적인 설명이 아니라 직접적인 경험과 구체적인 사례를 바탕으로 한 깊이 있는 이야기로 전달될 수 있으면 금상첨화(錦上添花)일 수 있다.

그런 교육이 이루어지려면 쉽고 간단하고 재미있는 교육만을 요구할 게 아니라 어렵고 힘들어도 지적 욕구를 채워 줄 수 있는 깊이 있는 내용을 바탕으로 교육과정이 구성되어야 하고, 학생이나 수강생이 원하는 교육을 할 게 아니라, 가르쳐야 할 내용을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

그래서 고대 철학자들은 논리학과 수사학, 기하학과 천문학 등을 함께 연구하면서, 교육과 강연은 물론, 모든 인간관계에서의 의사소통은 논리와 감정, 정서와 윤리 등(Logos, Pathos, Ethos)이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했다.

수업시간에 친절하고 자상한 선생님께서 고대 그리스 철학자의 생각을 설명하며 조선시대의 왕의 생활을 이야기 해 주면, “선생님, 이제 공부해요.”라고 항의하는 학생이 있고, 학생들을 운동장에서 뛰어 놀라고 하면, “저 선생님은 공부는 가르치지 않고 뭣 하는 거냐?”고 불평하는 부모가 있는 한, 전인교육(全人敎育)은 요원한 일이다. 그런 아이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 사회는 더욱 혼란스러워지고 사건사고는 더욱 흉악해질 수 있다는 예측은 어렵지 않다.

그래서 유럽의 어느 매체는 한국의 교육에 대해, “교육은 잘 시키지만, 창의적이지 않다(Well educated but not creative.)”고 흉을 보고 있는 것이다.

거칠고 불확실한 미래를 살기 위해 자녀에게 가르쳐야 할 것은 국영수만이 아니다.

쉽고 재미있고, 간단한 것은 교육의 본질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