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사람들과 어울려 생활하는 직장이나 단체, 조직에서는 여러 가지 문제들이 쉬지 않고 발생한다. 개인 생활이나 가정, 사회에서도 갈등과 고민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런 문제와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회의를 개최하고, 토론을 하며, 과감한 의사 결정을 한다. 여러 단계를 거치며 문제를 풀어 가는 과정에서 간과하기 쉬운 것이 한두 가지 있다. 즉 시작과 끝이다.





첫째, 문제를 발견하고 해석하는 초기 단계를 소홀히 하기 쉽다는 거다.



고객을 만나 문제점을 들어 보고, 하소연 하는 내용에 귀 기울이다 보면 때에 따라 전혀 다른 곳에 원인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원인(原因)에도 문제 발단의 근본적인 이유가 되는 근인(近因, 가까운 原因)이 있고, 그에 의해 파생적인 효과로 나타나는 원인(遠因, 간접적 原因)이 있다.



의사 소통이나 관심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정도에 따라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이나 들어 주는 사람이 이를 혼동하여 근본적인 치유를 생각해 내기 힘든 상황이 되어 버리는 경우가 있다.





“요즘 학생들은 공부는 많이 하고 교육비는 엄청나게 투자하는데 실력이 없어 걱정입니다. 학원도 많이 다니고, 인터넷 방송도 듣고 하는데 왜 실력이 저하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부모의 관심이나 각종 학습 방법의 발달, 교육투자의 증가 등에도 불구하고 학습효과가 저하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원인(原因)은 학생 스스로 공부하는 방법이나 습관을 멀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학원이나 과외선생님의 설명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지만, 충분히 이해했다고 생각하지만, 건성으로 듣거나 그때만 이해하고 돌아 섰다는 뜻이다.



집에 돌아 오면 스스로 책을 읽고 문제를 풀고 생각할 시간이 없이 또 다시 다른 과목을 들으러(Just listening, not thinking) 가고, 인터넷을 열고 다른 선생님의 강의를 듣게 된다. 컴퓨터 스크린 앞에 앉아 또 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 하지만, 즉시 질문도 할 수 없고 다른 의견을 개진할 수도 없다. 그저 알아 듣는 척 하고,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만 보여 주면서 부모님과 선생님의 마음만 안정시켜 주는 역할연기에 익숙해진다.



부모와 교사, 교수들 역시 학생들의 근본적인 학습 효율이나 인간 성장에는 관심을 갖기 어려운 환경과 상황에서 그저 인기를 얻기 위해 또는 현실을 오랫동안 유지하기 위해 큰 변화를 시도하지 않는다. 버틸 때까지 버티는 게 가장 현명한 처세일 수 있으며, 학생들 또한 자신들을 교육시키지 않고 단순히 가르치는(not education but teaching) 분들의 사정을 모르지 않는다.





서로, 모두들 혼자 고민하고 생각할 시간이나 장소가 주어지지 않는다.



문제를 스스로 이해하고 풀어 갈 기회 조차 박탈당하고 있다. 100분에 100문제를 풀어 내는 기술은 발달하지만 한 문제를 며칠씩 고민하며 풀어 내는 인내를 키워주지 못하게 된다.





그렇게 성장한 신세대 직장인과 교육자들에게 힘든 일을 시키려 하니 쉽게 설명해 달라고 하고, 어려운 교육이나 훈련을 하자고 하니 힘들다고 한다. 쉽고 편한 부서에서 간단하고 재미있는 일을 하면서 즐거운 직장문화를 만들어 달라고 요구한다.



새로운 제품을 팔고 없는 상품을 개발하고, 남들과 경쟁해서 돈을 벌어 주주와 경영자의 돈을 벌어 주고, 월급을 받는 일이 어찌 간단하고 쉽고 즐거울 수만 있겠는가? 어려운 고객을 만나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하는 일은 서로 하지 않으려 한다. 어려서부터 풍요롭게, 다른 이들의 유행에 뒤질세라, 힘들고 배고프다는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며, 풍부한 사랑을 넘치게 받으며 자란 그들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가? 공부하지 않고 학생운동이나 시민사회 활동에 참여한 학생들이 사회지도자 위치에 섰을 때, 과연 그들에게 논리적인 사고력과 역사적인 주인의식을 요구하는 건 무리일 수 밖에 없다.



세계적인 경제 질서와 자본의 흐름, 역사와 철학, 세계 지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자란 그들에게 국제 경쟁력을 이야기 하고, 문화의 가치를 설명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는가?





민주화 운동에 기여한 공로는 인정하고 고마워 하지만, 시대의 흐름에 걸 맞는 학습이나 노력이 지속적으로 따라 주지 않은 결과는 국가의 미래에 커다란 치명타를 가하게 되는 것이다.







둘째로, 끝 부분에서 나타나는 의사결정의 오류이다.



몇 가지 질문으로 생각을 이끌어 보자.





좋은 사람들이 내리는 결론은 옳은가?



그룹 내에 동일한 성향을 갖고 있는 사람들끼리의 지배력은 과연 정당한 흐름을 쫓아 가는 것인가? 오랫동안 유지되어 온 끈끈한 인맥과 단결력, 신뢰와 일체감이 두터운 그들끼리의 연대의식과 상황에서 과연 반대 의견을 낼 사람이 있을 수 있겠는가? 조직에 대한 소속감이나 집단적 믿음에 대한 복종, 위대한 힘을 배경으로 한 명령의 위력에 거역할 바보가 있겠는가? 그래서 민주 정당정치에서의 당파 싸움이 끊이질 않는 것인가?



결국, 다수(多數)는 옳은가? 어느 정도의 숫자가 다수인가?





1. 걸러진 정보밖에 갖고 있지 않은 상사와 강력한 권력을 갖고 있는 지도자 앞에서 올바른 의견을 개진할 용기를 갖춘 지도자가 어찌 나타날 수 있는가?



2. 쉽고 편한 세상에서 자란 젊은이들이 그런 인내와 용기를 배운 적이 있는가?



3. 오래된 연륜과 다양한 경험을 조화롭게 어울리도록 하면서,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아우를 줄 아는 걸 배운 적이 있는가?





고집과 편견, 편향된 사고, 갇힌 마음으로 세상을 구경한들 그것들이 제대로 보이고, 본래의 모습대로 눈과 마음에 읽혀지겠는가? 민주주의 시대를 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신문과 방송 채널을 선택하는 것부터 제약을 받아야 한다면, 과연 국가는 시민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가? 진실로 우리 국민은 21세기 국제화 시대를 살아 갈 자격이나 능력이 되는 사람들을 지도자로 모시고 있는가?



그래서 사람은 가끔, 그러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경우에 따라 가문과 성장 배경을 볼 수 밖에 없는가 보다.





정확한 예측으로 처형을 당한 러시아의 경제학자 “니콜라이 콘드라티에프의 50년 경제 주기설”에 따라, 36년의 일제시대와 3년의 전쟁을 치른 후, 50년간의 급속한 성장을 이어 온 나의 조국이 “50년의 후퇴”로 가는 건 아닐까 방정맞은 생각을 하게 하는 휴일 아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