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4일 입대한 정모(21)씨가 육군훈련소의 한 생활관 화장실에서 목을 매 숨졌다.

‘귀가 너무 아파 죽을 지경이다, 엄마가 밖에서 약을 보내줄 수 없느냐’는 내용의 편지가 사물함에서 발견다. “중이염 환자로 확정됐고, 극심한 고통을 호소했다면 부모에게 연락을 취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반 지하 쪽방에서 부모와 함께 살던 세살배기 남자아이가 아버지에게 폭행을 당하고, 연이은 폭행으로 죽음에 이르렀다. 비정한 아버지의 폭행은 아들이 죽음에 이를 때까지 계속됐고 반 지하 쪽방에서 아이의 울음소리가 계속하여 들렸지만, 이웃들은 원래 시끄러웠던 집으로만 여기고 경찰이나 아동보호기관에 신고조차 하지 않았다…

사회적 무관심과 외면이 사고를 불러 일으킨건 어제 오늘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아직도 이런 현상이 만연하게 일어나고 있는 걸까?

그들이 사회적 소수에 해당할 수 도 있지만, 더 중요한건 주변에서 가진
“설마….”라는 생각 때문이다.

“아이가 실종됐어요. 늘 이 시간엔 집에 오는데… 제발 위치 추적 좀…”
“그런 일로 위치 추적을 할 순 없습니다. 시간이 지나도 연락이 없으면 다시…”
결국 아이는 한 옥상에서 싸늘한 시체로 발견됐다. 소방서와 경찰서에서 조금만 빠른 대응과 관심을 가졌다면 혹시 살 수 도 있었던 생명이었다.

일어나지 않을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물론 이런 일들이 자주 일어나진 않는다.
하지만 대부분 “별 문제가 아니다”라는 생각들이 각종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어떤 경우엔 씻지 못할 과오로 남겨져 사람들 마음속 한켠에 후회와 안타까움으로 새겨놓고 만다.

‘설마’가 아니라 ‘혹시’라는 생각을 하라!
‘설마’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게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게 만들지만,
‘혹시’는 움직이고, 조사하고 계획하게 만든다.
결국 후회를 남기지 않는건 ‘ 설마’가 아니라 ‘혹시’라는 생각이다.
“설마 내가 한 말이 상처를 주진 않겠지?” 라는 생각을 버려라
“혹시 내가 한 말이 상처를 준다면?”이란 생각을 가진다면 말 한마디도 쉽게 나오진 않는다.

어느 신축건물이 붕괴된 직후, 경찰에서 관계자를 불러 심문했다.
경찰 : 건물이 무너질지도 모르는데 왜 사원들을 대피시키지 않았소?
관계자 :‘설마’ 무너지기야 할까 생각했지요
경찰 : 그럼 중역들은 왜 대피시켰소?
관계자 :‘혹시’ 무너질지도 모르는 것 아닙니까?

‘설마’라는 생각은 나이와 상황과 관계에 개의치 않고 가져야 한다.
남들도 다 그렇게 생각하더라도, 나 만큼은 ‘혹시’라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혹시 아는가?
그게 나와 다른 사람들을 위기에서 구해 줄 중요한 선택이 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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