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도요타자동차는 생산, 판매 대수에서 미국 제너럴모터스(GM)를 제치고 세계 1위 자동차 업체가 됐다. 도요타의 자체 실력이 아니라 ‘리먼쇼크’ 여파로 미국 자동차업계가 충격을 받은 덕분이다. 도요타도 이듬해인 2009년 글로벌 경기 불황으로 71년 만에 영업적자를 냈다.



실적 악화의 위기 속에 도요타자동차의 구원투수로 11대 사장에 오른 인물이 도요다 아키오다. 도요타자동차 창업자인 도요다 기이치로의 손자이다.

도요다 아키오 사장 취임 당시 오쿠다 히로시 전 사장은 “도요타그룹에 있어 도요다 가문은 회사 성장의 구심력이며 깃발”이라고 강조했다. 이 말이 상징하는 것처럼 도요타그룹에 오너 가문은 사원들을 이끌어 가는 지도자 역할을 맡고 있다.


세계 1위 도요타자동차 81년간 오너 경영 유지한 비결알고 보니
도쿄, 연간 실적 컨퍼런스에서 도요다 아키오 by Bertel Schmitt — Travail personnel




도요타자동차의 뿌리는 도요타직기(織機). 천재적인 발명가로 알려진 도요다 사키치가 설립한 도요타자동직기제작소 내에 사키치의 장남 기이치로가 1933년 설치한 자동차부가 도요타자동차의 모태가 됐다.



사키치와 기이치로는 경영자라기 보다 기술 장인이었다. 회사 경영보다 신제품 개발에 더 몰두했다. 기이치로의 자동차 개발은 난항 끝에 1935년 성공했다. 그는 첫 일본산 승용차의 시작품으로 트럭을 내놨다.

도요타는 정부에서 자동차제조사업 허가 회사의 지정을 받았다. 1937년 도요타자동차공업이 정식 창업했다. 초대 사장으로 도요다 리자부로, 부사장에 도요다 기이치로가 취임했다.



2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 도요타자동차는 군부의 트럭 생산 요청을 받아들여 도요타제강(현 아이치제강), 도요타공기, 도카이비행기(현 아이싱정기) 등 관련 회사를 설립했다. 하지만 전후 미군 사령부가 실시한 초긴축 재정정책에 따른 디플레이션으로 1950년 도산 위기를 맞았다.



도요더 기이치로 사장과 주요 임원들은 실적 악화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도요타자동직기제작소 사장이던 이시다 다이조가 도요타자동차의 사장도 겸하게 됐다. 그해 한반도에서 발발한 한국전쟁은 도요타자동차의 회생의 발판이 됐다. 군수용 트럭 주문이 쇄도해 실적이 급속히 좋아졌다. 누적적자를 털어낸 이시다 사장은 기이치로 사장의 복귀를 요청했으나 기이치로는 1952년 57세로 급사했다.



이때부터 도요타 오너 가문이 다시 경영을 맡은 1967년까지 전문 경영인이 사장을 맡아 어려운 시기의 도요타자동차를 경영했다. 도요타차를 지킨 전문 경영인 이시다 다이조는 도요타가문의 후계자를 키우기 위해 창업자 가문의 후손들에게 일부러 어려운 일들을 맡겼다. 이들의 실력을 키운 뒤 사장, 회장으로 옹립했다.



이시다는 창업자 일족들에게 경의를 표하면서도 냉정하게 그들의 능력을 시험했다. 경영 능력이 없다고 판단된 인물은 가혹하게 경영진에서 물러나게 했다. “창업자인 도요다 가문이라고 해서 도요타자동차의 최고경영자가 자동적으로 될 순 없다”는 게 이시다의 경영 철학이었다. 그의 생각은 오너 가문에도 긴장감을 불어넣기 충분했다.



현재 도요다 아키오 사장을 제외하면 역대 10명의 사장은 오너가 5명, 전문 경영인 5명씩으로 절묘한 비율이다. 무리하게 오너 가문의 경영자를 세습시키지 않았다. 필요한 시기에 능력이 검증된 전문 경영인을 기용한 결과 도요타자동차는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장수해 왔다는 게 업계의 분석이다.



한경닷컴 최인한 뉴스국장 janu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