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제공 : 소나무맘>


홍매화


 

도종환


 

눈 내리고 내려 쌓여 소백산자락 덮어도


매화 한 송이 그 속에서 핀다


 

나뭇가지 얼고 또 얼어


외로움으로 반질반질해져도


꽃봉오리 솟는다


 

어이하랴 덮어버릴 수 없는


꽃 같은 그대 그리움


 

그대 만날 수 있는 날 아득히 멀고


폭설은 퍼붓는데


 

숨길 수 없는 숨길 수 없는


가슴 속 홍매화 한 송이


 

[태헌의 한역]


紅梅(홍매)


 

雪降又積埋小白(설강우적매소백)


梅花一朶此中動(매화일타차중동)


枝凍又氷有油光(지동우빙유유광)


花峰亦是此中聳(화봉역시차중용)


吾柰何不得蔽(오내하부득폐)


向君思如花坐(향군사여화좌)


逢君日猶渺遠(봉군일유묘원)


暴雪誠若傾瀉(폭설성약경사)


不可藏不可藏(불가장불가장)


胸中紅梅一朶(흉중홍매일타)


 

[주석]


* 紅梅(홍매) : 홍매화.


雪降又積(설강우적) : 눈이 내리고 또 쌓이다. 원시의 “눈 내리고 내려 쌓여”를 간략히 표현한 말이다. / 埋(매) : ~을 덮다. / 小白(소백) : 소백산(小白山).


梅花(매화) : 매화. / 一朶(일타) : 한 송이. / 此中(차중) : 이 속에서. 원시의 “그 속에서”를 고쳐 한역한 말이다. / 動(동) : 움직이다. 여기서는 꽃이 핀다는 의미로 사용하였다.


枝凍又氷(지동우빙) : 나뭇가지가 얼고 또 얼다. 한역시 제1구의 ‘雪降又積’과 짝을 맞추어 주기 위하여 ‘凍’과 함께 ‘氷’자를 사용하였다. / 有油光(유유광) : 기름 빛이 있다, 반질반질하다.


花峰(화봉) : 꽃봉오리. 이 한자어는 우리나라와 일본에서 주로 쓰인다. 현대 중국어에서는 ‘花蕾(화뢰)’라는 표현을 쓴다. / 亦是(역시) : 역시, 또한. 바로 아래의 ‘此中’과 함께 한역의 편의를 위하여 원시에 없는 말을 역자가 임의로 보탠 것이다. / 聳(용) : 솟다, 솟아오르다.


吾柰何(오내하) : 내가 어쩌랴! ‘吾’는 원시의 생략된 주어를 역자가 복원시킨 말이다. / 不得蔽(부득폐) : 덮을 수 없다.


向君思(향군사) : 그대 향한 그리움. 원시의 “그대 그리움”을 풀어서 쓴 표현이다. / 如花坐(여화좌) : 꽃처럼 앉다. 원시의 “꽃 같은”이라는 관형어를 한역시에서 후치(後置)시키면서 역자가 만들어본 표현이다.


逢君日(봉군일) : 그대를 만날 날. 원시의 “그대 만날 수 있는 날”을 간략히 줄인 말이다. / 猶(유) : 오히려, 아직. 한역의 편의를 위하여 원시에 없는 말을 역자가 임의로 보탠 것이다. / 渺遠(묘원) : 멀어 아득하다, 아득히 멀다.


暴雪(폭설) : 폭설. / 誠若(성약) : 진실로 ~와 같다. / 傾瀉(경사) : 기울여 쏟다. * 이 구절은 원시의 “폭설은 퍼붓는데”를 다소 의역한 것이다.


不可藏(불가장) : 감출 수 없다, 숨길 수 없다.


胸中(흉중) : 가슴 속.


 

[한역의 직역]


홍매화


눈 내리고 또 쌓여 소백산 덮어도


매화 한 송이 이 속에서 핀다


나뭇가지 얼고 또 얼어 반질해져도


꽃봉오리 역시 이 속에서 솟는다


내 어이하랴, 덮어버릴 수 없는


꽃처럼 앉은 그대 향한 그리움!


그대 만날 날은 아직 아득히 멀고


폭설은 정말 기울여 쏟는 듯한데


숨길 수 없는, 숨길 수 없는


가슴 속 홍매화 한 송이!


 

[한역 노트]


그 옛날 정몽주(鄭夢周) 선생이 <단심가(丹心歌)>에서 얘기한 ‘일편단심(一片丹心)’의 붉은 빛이 임금이나 나라에 대한 충심(忠心)을 상징하는 것이라면, 이 시에서 시인이 언급한 ‘가슴 속 홍매화 한 송이’의 붉은 빛은 가혹한 시련에도 포기할 수 없고 사라지지도 않을 연심(戀心)을 상징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눈 속에서도 향기롭게 피어난다 하여 강인함과 고아함의 대명사처럼 운위(云謂)되는 매화(梅花)에, 이처럼 사랑의 속성까지 보탠 것은 잘은 몰라도 시인이 아마 처음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이 시는 매화의 강인함과 고아함 가운데 강인함에, 매화의 색깔과 향기 가운데 색깔에 무게중심을 둔 시이다. 그리하여 이 시는 시인이 충분히 의도했음직한 ‘사랑의 정열’을 부차적으로 떠올리게 한다. 붉은 정열이 없는 사랑이 어찌 사랑이겠는가! 그러기에 같은 매화라도 이 시에서는 청매나 백매가 아니라 홍매가 더 잘 어울리는 것이다. 역자가 보기에 시인이 예찬한 홍매는 바로 ‘눈과 얼음 속에서도 피어나는 붉은 사랑의 정열’이다.


흔히들 모든 것은 변한다고 한다. 시간과 공간이 만들어가는 현실이라는 변수 속에서, 그것이 실체든 관념이든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변하기 마련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역자는 변하지 않는 것도 있다는 것을, 또 변해도 아주 더디 변하는 것도 있다는 것을, 사는 곳이 멀어 자주 만날 수 없는 내 고마운 벗에게 소개해주고자, 낡은 기억의 창고를 뒤지고 뒤져 마침내 이 시를 찾아내었더랬다. 아, 그 순간 어찌나 반갑던지! 인터넷이 아니라면 감히 꿈도 꾸지 못했을 일이 이렇게 이루어지고 있으니 우리들 일상의 하루하루가 따지고 보면 기적이 아닌 날 없다. 어찌 꼭 물위를 걸어야만 기적이겠는가!


차가운 눈과 얼음 속에서도 피어나는 매화... 역자는 사랑이라면, 인생이라면 그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감탄고토(甘呑苦吐)와, 내가 따스할 때와 추울 때의 상대방 태도가 확연하게 달라지는 염량세태(炎凉世態)가, 제 아무리 인간 세상의 비정한 풍속도라 하더라도 그렇지 않은 경우 또한 있음을 벗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신흠(申欽) 선생은 “매화는 한평생 추워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梅一生寒不賣香(매일생한불매향)]”고 하였다. 몸은 진흙탕 투성이 연못 속에 두고 있어도 거기에 물들지 않는 저 연(蓮)과 비슷하게, 이 티끌세상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면서도 함부로 영혼을 팔지 않는 저 매화를 우리는 배울 필요가 있다.


시인이 비록 시에서 매화의 고아함을 얘기하지는 않았지만, 매화의 향기가 가식이 아니듯 사람이 풍기는 향기가 진실된 것이라면, 그 사람은 저절로 고아해지게 될 것이다. 진실 앞에서 비겁해지는, 다시 말해 뻔뻔스럽게 거짓을 진실로 호도하는 사람은, 그의 지위와 위세가 설령 하늘을 찌른다 하더라도 그는 천박한 사람이다. ‘고아(高雅)’와 ‘천박(淺薄)’은 그가 몸 두고 있는 자리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가슴에 담긴 영혼의 무게에 의해서 결정될 것이기 때문이다.


물든 나뭇잎 하나만 떨어져도 이미 가을이듯, 매화나무 가지에 꽃 하나만 피어도 벌써 봄이다. 매화의 계절이 빨라진 것이 지구 온난화 현상 때문이라 하더라도, 우리 허허로운 삶에 봄이 하루라도 빨리 온 것은 그만큼 반길 만한 일이 아닌가! 역자의 옛날 연구실 앞에서 이른 봄이면 환하게 웃어주던 ‘옥과 같은 얼굴[玉面(옥면)]’이 못내 그리운 날이다.


역자는 5연 10행으로 된 원시를 칠언 4구와 육언(六言) 6구로 이루어진 도합 10구(句)의 고시로 재구성하였다. 이 과정에서 2연의 “외로움으로”는 한역을 하는 것이 오히려 어색해질 수 있다고 판단하여 의도적으로 한역을 생략하였다. 원시의 3연 이하를 굳이 다소 생소한 육언구로 한역하게 된 까닭은, 원시에 없는 내용을 부득이 덧보태야 하는 상황을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한역시는 짝수구마다 압운(押韻)을 하였으나 칠언구와 육언구의 운을 달리 하였다. 그리하여 이 시의 압운자는 ‘動(동)’·‘聳(용)’과 ‘坐(좌)’·‘瀉(사)’·‘朶(타)’가 된다.


2021. 2. 16.


강성위 한경닷컴 칼럼니스트(hanshi@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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