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 어디를 걸을까 풍광을 찾아서
[홍재화의 걷기인문학] 걷기의 재해석 : 어디를 걸을까? 풍광을 찾아서
풍경(風景)은 빛과 그림자가 있는 순수한 자연의 경치이고, ‘사람(儿=人)’이 붙은 ‘光’을 쓰는 ‘風光’은 ‘풍경’이라는 뜻과 함께 인위적인 문화의 의미도 깃들어 있는 말이다. 그러니까 꼭 야외로 나가 경치 좋은 곳만 걸어야 취미 삼아 걷는 게 아니라, 내가 사는 곳의 도시 경치를 보면서 걷는 재미도 좋다는 것이다. 늘 살던 곳, 오가던 곳만 걷지 말고 평소 가지 않는 곳으로 집을 나서면 된다. 신발과 세상에 대한 호기심만 있으면 된다. 세상에 똑같은 경치는 없다. 같은 곳이라도 한 걸음 앞에서 보는 것과 한 걸음 뒤에서 보는 경치는 다르고 매번 그 경치에 출연하는 사람, 자동차, 동물은 다르다. 저기 횡단보도를 걷는 사람은 진짜로 있는 것일까, 아니면 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을 품어볼 수 있다.

도시 속 자연 걷기

걸으면서 많은 곳의 좋은 풍광을 보았다.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경치는 좋은 친구들과 올라가서 본 인왕산, 남산 그리고 개운산에서 본 서울이다. 추운 겨울이나 무더운 한여름에 산꼭대기에서 친구들과 시원한 막걸리, 뜨거운 컵라면을 후후 불면서 안주 삼아 막걸리 마시며 쳐다보는 서울이 최고의 풍광이다. 서울은 복잡하다. 빌딩도 많고 사람도 많고 주변에 산도 많다. 산으로 둘러싸인 빌딩에 둘러싸인 사람들이 오가는 모습, 그리고 나도 역시 그 사람들에 둘러싸여 살아가고 있다는 실증적 체험이다. 어제는 그리고 조금 전 저 바쁜 도시 속에서 있던 내가 지금은 한 발짝 떨어져 한 차원 높은 곳에서 서울을 내려다본다. 이처럼 내가 자연 속에서 도시를 보고 사람을 볼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한국은 어디서나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정말로 복 받은 나라에 산다는 것을 보여준다. 적당하게 산에 둘러싸인 한국은 도시를 걸으면서 자연을 느낄 수 있다. 도시 속 산들은 찌를 듯이 사람들에게 위압감을 주지 않고, 오르고 걷기에 부담을 적게 준다. 그리고 그 산속에 들어가면 산자락을 둘러가면서 적당히 걷기 좋게 만들어진 수많은 산책로가 갈래갈래 퍼져있다. 같은 산을 들어가더라도 다른 자연을 느끼며, 다른 도시의 풍광을 즐길 수 있다. 한강변과 한강으로 흘러드는 성북천과 같은 작은 개천을 따라 지자체가 조성한 길도 걷기에 좋은 도심 속 자연걷기의 대상이다.

도시 속 문화 걷기

“여행을 할 때는 배낭 이외에 활길, 쾌활함, 용기 그리고 즐거운 마음을 충분히 비축해 가지고 떠나는 것이 매우 좋다.” (다비드 드 브르통의 걷기 예찬에서)

생존을 위해 아등바등 노력하는 자리에서 벗어나는 것만 해도 마음은 편해진다. 그 자리가 비록 콘크리트와 유리로 싸인 도시라도 상관없다. 도시 여행을 떠나보자. 길거리에는 편의점과 카페 그리고 식당으로 가득해서 배낭을 밸 필요가 없다. 혼자 걸어도 길을 잃거나 무서운 개나 강도를 만날 염려도 없다. 누군가와 같이 떠나도, 혼자서 아무 때나 떠나 좋은 게 도시 여행이다. 사람이 모여 사는 도시는 각 도시마다의 독특한 문화가 있다. 사람이 조성한 건축물이 볼만한 거리도 있고, 자연적으로 조성된 공원이 있을 수 있고, 역사적인 인물이 지나가거나 살았던 집도 있다. 서울에서 도심을 걷는다면 충무로의 남산골 한옥마을에서 남산으로 이어지는 길도 좋고, 도심을 꿰뚫고 지나가는 청계천도 좋고, 경복궁에서 창덕궁 또는 종묘를 걷는 길도 좋다. 아니면 그저 바쁘게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걷는 종로, 광화문 거리도 걸을 만하다.

도심 여행의 핵심은 ‘한가롭게 걷기’이다. 한국 사람은 뭐든 빨리 빨리하려고 하는데, 도시 여행은 느림보여야 제 맛이다. 남들이 깜박이는 신호등을 놓치지 않으려고 뛸 때, 뒤에서 멀거니 쳐다보며 ‘저 사람은 왜 저렇게 뛰지?’라면 의아해 해보는 재미로 걸어야 한다. 같이 뛰면 그건 도시 여행이 아니라 도시에서 일을 하는 시간의 연속일 뿐이다.

자연 걷기

자연의 경치를 찾아 길을 나서는 것도 좋다. 설악산 대청봉까지는 아니어도 오색약수터에서 주전골을 지나 선녀탕으로 가는 길은 걷기 좋게 만들어져 있다. 구부러지면 나타나는 새로운 계곡은 감탄을 자아낸다. 홍천 수타사 계곡도 마음 놓고 자연을 음미하며 걷기에 좋은 곳이다. 자연을 걷는 것은 마음을 편하게 하고 눈도 시원하게 하고 거기에다 운동까지 상당한 효과가 있다. 우선 마음먹고 도시를 나왔는데 1~2킬로 걷자고 나오지는 않는다. 조그만 왕릉을 걷기만 해도 3~4킬로는 넉넉히 나오고, 한강의 풍경을 보면서 팔당에서 운길산역까지만 걸어도 9km에 세 시간은 걸린다. 실내에서 러닝머신 위를 걸을 때보다 같은 거리를 걸어도 더 힘이 들다. 왜냐하면 땅을 박차는 힘이 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스마트 폰이나 TV를 보면서 걷는 것보다는 자연의 다채로운 풍경을 즐기면서 걷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되고, 자연스럽게 운동 시간이 연장된다. 봄의 초록 나무, 여름의 짙은 녹색의 나무, 가을의 노랗고 빨간 나무 그리고 겨울의 벌거벗은 갈색 나무처럼 다채로운 풍경은 걷기의 지루함과 힘듦을 잊게 해주기 때문이다. 또한 나무에서 풍겨주는 피톤치드 향은 걷는 동안 온 몸의 활기가 되살아나고, 곧 건강해질 것 같은 기분을 주기에 충분하다. 자연 걷기의 백미는 뭐니 뭐니 해도 비 맞으면서 걷기이다. 빗소리를 들으며 우산 속을 걸어도 좋고, 비의 후드득거림을 그대로 온몸으로 두들겨 맞으며 판초를 입고 걸어도 좋다. 질척해진 땅의 질감은 보도블록과 포장도로에 익숙해진 도시인들에게는 귀한 감흥이다. 이런 악천후는 걸을 때는 힘들고 불쾌할 수도 있지만, 결국 편하게 좋은 날씨에 걷기보다 더 기억에 남는다.

둘레길 걷기

둘레길은 도시 걷기와 자연 걷기의 장점을 두루 갖춘 현대적인 길이다. 자연과 도시를 걷지만 현대인들이 불편해할 만한 위험과 불확실성을 제거하였다. 도시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도 않아 접근성도 좋다. 서울에는 북한산 둘레길, 서울 둘레길이 있고, 각 지방마다 잘 조성되어 있다. 서울 둘레길은 산 둘레를 잇는 숲길 85㎞, 하천길 32㎞, 마을길 40㎞ 등 서울 둘레 157㎞를 이어 놓았다. 북한산 둘레길은 기존의 샛길을 연결하고 다듬어서 북한산 자락을 완만하게 걸을 수 있도록 조성한 저지대 수평 산책로이다. 전체 71.5km이며 각각의 특별한 테마를 지닌 21개의 코스로 이루어져 있다. 둘레길의 특징은 언제 어디서든 시작할 수도 있고, 또 끝낼 수 있다는 간편화된 순례길 같은 느낌이다. 지리산, 설악산이나 백두대간 종주처럼 커다란 배낭이나 무겁고 두터운 등산화도 필요 없다. 그저 평상복에 걷기 편한 신발이면 족하다.

걷는 것은 인간이 지닌 본질적인 것, 두 발을 이용해서 세상을 여행하는 일이다. 그날 걷는 행로에 필요로 하는 이상의 군더더기들은 괴로움과 땀과 힘겨움을 갖게 할 뿐이다. 모든 소유로부터 자유로워지면서 나와 동행과 풍경의 일치가 이루어 시간이다. 동행이 좋을 때는 동행과 좋은 대화를 하면서 걷고, 자연이 좋을 때는 자연의 멋짐을 감탄하며 걷고, 도시의 문명이 위대해 보일 때는 인간의 위대함을 찬양하면서 걷자. 그러다 보면 우리는 새삼스레 우리 멋진 세상을 살고 있음을 감사하게 여길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멋지고 훌륭한 세상을 볼 수 있게 해주는 건강한 두 다리에 또 감사하게 된다.

홍재화 한경닷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