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시, 한시로 만나다] 가을밤, 김시탁

가을밤



김시탁



언어가 시를 버리고


시가 시인을 버린 채


사전 속으로 걸어 들어가


책갈피 속 낙엽으로


문을 꼭꼭 걸어 잠그는 밤



내 영혼의 퓨즈가 나가


삶이 정전된 밤



[태헌의 한역]


秋夜(추야)



言語棄詩歌(언어기시가)


詩歌棄詩手(시가기시수)


言語與詩歌(언어여시가)


終向辭典走(종향사전주)


自以書中葉(자이서중엽)


爲扃固關牖(위경고관유)



吾魂熔絲燒(오혼용사소)


吾生斷電宵(오생단전소)



[주석]


* 秋夜(추야) : 가을밤.


言語(언어) : 언어, 말. / 棄(기) : ~을 버리다. / 詩歌(시가) : 시가, 시.


詩手(시수) : 시인(詩人).


與(여) : 연사(連詞). ~와, ~과.


終(종) : 마침내. 한역의 편의를 위하여 원시에 없는 말을 역자가 임의로 보탠 것이다. / 向辭典走(향사전주) : 사전을 향해 걸어가다. 사전 안으로 들어간다는 의미로 쓴 말이다.


自(자) : 스스로. 한역의 편의를 위하여 원시에 없는 말을 역자가 임의로 보탠 것이다. / 以書中葉(이서중엽) : 책 속의 낙엽으로, 책 속의 낙엽을. 낙엽은 책갈피에 끼워둔 나뭇잎을 가리킨다.


爲扃(위경) : 빗장을 삼다, 빗장으로 삼다. 한역의 편의를 위하여 원시에 없는 말을 역자가 임의로 보탠 것이다. 앞의 시구 ‘以書中葉’에서 이어지는 말로 책 속의 낙엽으로 빗장을 삼는다는 뜻이다. / 固(고) : 굳게. /關牖(관유) : 창문을 잠그다. 역자는 압운(押韻) 때문에 ‘牖’를 ‘門(문)’의 뜻으로 사용하였다.


吾魂(오혼) : 내 영혼. / 熔絲(용사) : 녹는 철사, 퓨즈. / 燒(소) : 타다, (퓨즈가) 녹다·나가다.


吾生(오생) : 내 삶. / 斷電(단전) : 정전(停電). / 宵(소) : 밤[夜].



[한역의 직역]


가을밤



언어가 시를 버리고


시가 시인을 버린 채


언어와 시가


마침내 사전 향해 걸어가


스스로 책 속의 낙엽으로


빗장 삼아 문 꼭꼭 거나니



내 영혼의 퓨즈가 나가


내 삶이 정전된 밤!



[한역 노트]


시는 시인이 쓰고 감상은 독자들이 하는 것이다. 종종 생기는 독자들의 오해는 시인이 의도한 것이 아니므로 시인에게 허물을 돌릴 수 없고, 같은 논리로 독자들이 때로 오해했다 해서 시인이 독자들을 책망할 필요도 없다. 요컨대 의도적으로 곡해하거나 악의적으로 왜곡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시의 해석은 독자들의 재량이 얼마든지 허용되는 영역인 것이다.


이 재량권을 가진 독자의 한 명인 역자가 보기에 이 시의 주제는 한 마디로 ‘시가 안 되는 밤’이다. 시가 안 되면 그만두면 될 일인데도 그만둘 수 없는 무슨 사연이 있어서 시인이 이래저래 고민하다가 우연찮게 이 시를 짓지 않았을까 싶다. 주지하다시피 시는 ‘언어’를 엮어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그 언어가 자기의 집이랄 수 있는 사전 속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버린다면, 다시 말해 시어가 꽁꽁 숨어버린다면 제 아무리 뛰어난 시인이라 하여도 용빼는 재주가 없을 것이다. 기운이 산을 뽑을 만했던 항우(項羽) 역시 오추마(烏騅馬)가 나아가지 않아 어쩔 수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언어가 시를 버린다는 것은, 시인의 뇌리에 시어로 쓸 만한 마땅한 언어들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간신히 시어들이 떠올라 시 몇 구절을 만들기는 했지만 연결도 잘 안 되는 상황이라면, 다시 말해 몇 구절의 시가 시인의 마음에 흡족하지 못한 상황이라면, 이는 시가 시인을 버리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어쨌거나 언어가 시를 버렸다는 것이나 시가 시인을 버렸다는 것은 시가 잘 되지 않는다는 말과 그리 다르지 않다.


그런데 사전 속으로 걸어 들어간 언어들이 ‘책갈피 속 낙엽으로 문을 꼭꼭 걸어 잠근다’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역자는 이 대목의 경우 낙엽을 책갈피에 끼워 말리는 일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본다. 낙엽을 끼워둘 책은 두꺼울수록 좋고, 한동안 닫힌 채로 있어야 한다. 두께로야 사전만한 책이 어디 있겠는가! 이 때문에 사전이 열리지 않게 되었을 테니 결과를 놓고 보자면 낙엽이 모든 언어의 집인 사전의 문을 닫아 건 것이나 진배없게 되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시인의 ‘낙엽’에 관한 언급은 의미가 있다.


또 시인이 시를 쓰자면 이것저것 생각해야 할 게 많다. 그러므로 생각이 끊어져서는 안 된다. 전기로 치자면 늘 통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그 생각의 선(線)이 끊어져버려 시어 선택도 안 되고 시구도 엮어지지 않는다면, 전기로 치자면 퓨즈가 나간 것과 다름없다. 퓨즈가 나가면 바로 정전(停電)이다. 시가 삶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 되는 시인에게는 시의 정전은 곧 삶의 정전이다.


시인에게 시가 정전이 되었다면 보통의 경우 노트북을 닫고 담배를 피워 물거나 술병을 찾게 될 것이다. 그런데 시인은 그러지를 않고(그랬을 수도 있겠지만) 시가 안 된다는 것을 이렇게 멋지게 시로 썼으니, 따지고 보면 시가 안 된 것도 아니다. 애초에 쓰려고 했던 시를 못 썼을 수는 있어도 이렇게 근사한 시 한 수를 건졌으니, 시가 안 된 그날 밤을 오히려 고마워해야 하지 않을까?


역자는 2연 7행으로 된 원시를 8구의 오언고시로 재구성하였다. 이 과정에서 한역의 편의를 위하여 원시에 없는 말을 몇 군데 임의로 보태기도 하였다. 6구까지는 짝수 구에 압운을 하였으며, 7구와 8구에서는 운을 바꾸어 매구에 압운하였다. 그러므로 이 한역시의 압운자는 ‘手(수)’·‘走(주)’·‘牖(유)’, ‘燒(소)’·‘宵(소)’가 된다.


2020. 11. 10.


강성위 한경닷컴 칼럼니스트(hanshi@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