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시, 한시로 만나다] 감, 허영자



허영자



이 맑은 가을 햇살 속에선


누구도 어쩔 수 없다.


그냥 나이 먹고 철이 들 수밖에는.



젊은 날


떫고 비리던 내 피도


저 붉은 단감으로 익을 수밖에는.



[태헌의 한역]


枾(시)


如此淸雅秋陽裏(여차청아추양리)


無論是誰不得已(무론시수부득이)


只得加歲又明理(지득가세우명리)



吾人行年如桃李(오인행년여도리)


生澁腥臭血亦是(생삽성취혈역시)


只得熟爲紅甘枾(지득숙위홍감시)



[주석]


* 枾(시) : 감.


如此(여차) : 이처럼. / 淸雅(청아) : 청아하다, 맑고 아름답다. / 秋陽裏(추양리) : 가을 햇살 속(에서).


無論是誰(무론시수) : 누구든 관계없이, 아무나, 누구도. / 不得已(부득이) : 부득이하게, 어쩔 수 없이.


只得(지득) : ~하는 수밖에 없다. ‘只能(지능)’과 같다. / 加歲(가세) : 나이를 더하다, 나이 먹다. / 又(우) : 또, 또한. / 明理(명리) : 사리에 밝다, 철이 들다.


吾人(오인) : 나. / 行年(행년) : 먹은 나이, 나이. / 如桃李(여도리) : 도리(桃李)와 같다. ‘桃李’는 복숭아와 오얏, 또는 그 꽃이나 열매를 가리킨다. ‘行年如桃李’는 꽃다운 젊은 나이를 뜻하는 ‘도리년(桃李年)’을 풀어서 쓴 표현이다. ‘吾人’ 이하의 이 시구는 원시의 ‘젊은 날’을 역자가 임의로 내용을 늘려 한역(漢譯)한 것이다.


生澁(생삽) : 떫다. / 腥臭(성취) : 비리다. / 血(혈) : 피. / 亦是(역시) : 역시, 또한.


熟爲(숙위) : 익어서 ~이 되다. / 紅甘枾(홍감시) : 붉은 단감.



[한역의 직역]




이처럼 청아한 가을 햇살 속에선


누구도 어쩔 수 없다


그냥 나이 먹고 또 철 들 수밖에는.



내 나이 도리(桃李) 같던 때에


떫고 비리던 피 역시


익어서 붉은 단감이 될 수밖에는.



[한역 노트]


맑은 가을 햇살 속에서는 모든 것이 익어간다. 곡식과 과일은 말할 것도 없고 사람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시인은 “나이 먹고 철이 들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들녘에 서서 익어가는 것들을 본 적이 있는 경우라면 시인의 이 말이 더 핍진(逼眞)하게 다가올 것이다. 교만을 내려놓고 겸허를 배우기 좋은 곳이 바로 가을철 들녘이다. 해질 무렵 서걱이는 바람 속에서 무거운 곡식과 열매를 달고 있는 피조물을 보고 있노라면 대자연의 위대함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아니, 굳이 들녘이 아니더라도 그렇게 익어가고 있는 것이 잘 보이는 곳에 서기만 하여도 우리의 마음은 어느새 겸허해지기 마련이다. 그 겸허해진 만큼 우리는 익은 것이 되리라.


그런데 익어가고 있는 것이 왜 하필이면 붉은 단감일까? 시에서 말하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붉은 단감의 빛처럼 아름답게 성숙하라는 뜻일 게다. 또 단감의 맛처럼 달콤하게 성숙하라는 뜻일 게다. 감이 가을 햇살에 더 빛나도록 하기 위해 감나무가 잎을 내려놓듯 우리가 아직 내려놓지 못하는 무엇인가가 있다면, 그것은 아름다운 성숙이 아닐 것이다. 또 맛있는 성숙도 아닐 것이다. 젊은 날의 “떫고 비리던 피”까지 달디 단 감으로 익어가게 하는 가을이야 말로 정말 위대한 계절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 위대한 계절 어느 한 켠에서 한 자락 슬픔을 느끼는 사람도 있다.


역자가 시골 출신이라 그렇기도 하겠지만 역자의 고향집 텃밭에 큰 감나무가 여러 그루 있어서 역자는 도회지에서 감나무만 보아도 고향 생각이 절로 난다. 그리하여 가을이 되면 누구보다 더한 향수(鄕愁)로 가슴앓이를 하는 일이 잦았다. 올해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어느 날 길을 가다가 감나무에 달린 홍시를 보고는 불현듯 아래와 같은 시 한 수를 지어보게 되었다.


行路看紅枾(행로간홍시) 길을 가다가 붉은 감 보았더니


風中土思添(풍중토사첨) 바람 속에 고향 생각 더해지네


金秋使人淚(금추사인루) 가을이 사람 눈물짓게 하여도


滋味固甘甛(자미고감첨) 맛은 정말이지 달고도 달구나


이 시의 핵심이 되는 3·4구의 시상(詩想)은 역자의 독창(獨創)이 아니라 SNS 동호회에서 읽게 된 손경석님의 시 <홍시>를 참고한 것이다. 가을의 맛이 달다고 한 것은 당연히 ‘감’에서 가져온 거지만, 기실 가을은 생각하기에 따라 바람도 달고 햇살도 달고 풍경도 달고 심지어 향기까지 달기 때문에, 역자는 이 시에 <秋之味(추지미):가을의 맛>라는 제목을 붙여보았다.


그러나 그날 가을 한 가운데에 서 있었던 역자의 마음은 결코 달지 못하였다. 고향과 피붙이에 대한 그리움에 더해 역자가 감나무 밑에서 꾸었던 소년시절의 여린 꿈들이 빛바랜 감잎처럼 발밑에 쌓여 가을 소리를 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설혹 그렇다 하여도 가을이 이토록 달고 아름다우니 가을을 노래하고 즐겨야 하지 않겠는가! 누구나 그렇겠지만 역자가 미련의 잎들 떨구는 것 역시 가을을 성숙의 계절로 빛나게 하는 일이 될 듯하다. 이 대목에서 다시금 이 시에, 그리고 시인에게 고마움을 표한다.


역자는 2연 6행으로 된 원시를 칠언(七言) 삼구시(三句詩) 두 수로 재구성하였으며, 두 수 모두 같은 운으로 매구(每句)에 압운하였다. 그러므로 이 한역시의 압운자는 ‘裏(리)’·‘已(이)’·‘理 (리)’, ‘李(리)’·‘是(시)’·‘枾(시)’가 된다.


2020. 11. 3.


강성위 한경닷컴 칼럼니스트(hanshi@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