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시, 한시로 만나다] 중앙선 타고 가며, 이기철

중앙선 타고 가며



이기철



안동 지나 제천 간다



내려다보면 한 잎 호박잎에도 폭 싸일 초등학교


저 창문과 교실 위로


무수한 화요일이 지나갔구나


내 일곱 살, 저 교실에서 책 열지 않았으면


긴 일생, 무거운 언어의 짐 지지 않고 살아도 되었을 것을



【태헌의 한역】


乘中央線列車而行(승중앙선열차이행)



今過安東向堤川(금과안동향제천)


俯看下有校一座(부간하유교일좌)


小學校舍正如何(소학교사정여하)


南瓜一葉能包裹(남과일엽능포과)


彼窓門與敎室上(피창문여교실상)


應覺無數歲月過(응각무수세월과)


吾年七歲敎室裏(오년칠세교실리)


萬若不開數卷書(만약불개수권서)


身歷長長一生來(신력장장일생래)


不擔言語可安居(부담언어가안거)



[주석]


* 乘~而行(승~이행) : ~을 타고 가다. / 中央線列車(중앙선열차) : 중앙선 열차. 시에는 열차라는 말이 따로 없지만 ‘중앙선’이라는 말과 전체 내용으로 볼 때 중앙선 열차가 분명하기 때문에 ‘列車’ 두 글자를 보충하였다.


今(금) : 지금. 한역의 편의를 위하여 원시에는 없는 말을 역자가 임의로 보탠 것이다. / 過(과) : ~에 들리다, ~를 지나다. / 安東(안동) : 경북 안동. / 向(향) : ~로 향하다. ~로 향해 가다. / 堤川(제천) : 충북 제천.


俯看(부간) : 내려다보다, 굽어보다. / 下有(하유) : 아래에 ~이 있다. / 校一座(교일좌) : 학교 하나. ‘座’는 학교와 같은 집합적인 장소를 세는 양사(量詞)이다. ‘校一座’는 한역의 편의를 위하여 원시에는 없는 말을 역자가 임의로 보탠 것이다.


小學校舍(소학교사) : 소학교 교사(校舍). ‘校舍’는 한역의 편의를 위하여 원시에는 없는 말을 역자가 임의로 보탠 것이다. / 正如何(정여하) : 정녕 어떠한가? 이 역시 한역의 편의를 위하여 원시에는 없는 말을 역자가 임의로 보탠 것이다.


南瓜(남과) : 호박. 一葉(일엽) : 잎 하나, 한 잎. / 能包裹(능포과) : ~을 쌀 수 있다. ‘包’와 ‘裹’는 둘 다 물건 따위를 싼다는 뜻이다.


彼(피) : 저, 저것. / 窓門(창문) : 창문. / 與(여) : ~과, ~와. 연사(連詞)이다. / 敎室(교실) : 교실. / 上(상) : ~의 위, ~의 위에.


應覺(응각) : 응당 ~을 알다. / 無數(무수) : 무수한, 무수히. / 歲月過(세월과) : 세월이 지나가다.


吾年(오년) : 내 나이. / 七歲(칠세) : 7세, 일곱 살. / 敎室裏(교실리) : 교실 안.


萬若(만약) : 만약. / 不開(불개) : ~을 열지 않다. / 數卷書(수권서) : 몇 권의 책. ‘數卷’은 한역의 편의를 위하여 원시에는 없는 말을 역자가 임의로 보탠 것이다.


身(신) : 몸, 일신, 나. 한역의 편의를 위하여 원시에는 없는 말을 역자가 임의로 보탠 것이다. / 歷~來(역~래) : ~을 지나오다. 한역의 편의를 위하여 원시에는 없는 말을 역자가 임의로 보탠 것이다. / 長長一生(장장일생) : 길고 긴 일생.


不擔言語(부담언어) : 언어를 짊어지지 않다, 언어라는 짐을 지지 않다. / 可安居(가안거) : 편안히 살 수 있다.



[한역의 직역]


중앙선 열차를 타고 가며



지금 안동 지나 제천 가며


내려다보니 아래에 학교가 하나


소학교 교사는 정녕 어떠한가?


호박잎 하나로도 쌀 수 있을 듯


저 창문과 교실 위로


무수한 세월이 지나갔음을 알겠네


내 나이 일곱 살 때 교실 안에서


만일 몇 권의 책 열지 않았으면


내 길고 긴 일생 지나오면서


언어의 짐 지지 않고 편히 살았을 것을



[한역 노트]


역자가 이 시에 끌리게 된 것은 역자의 고향이 안동이어서도 아니고, 역자가 다닌 초등학교가 안동역 지나 제천역 가는 길에 기차에서 내려다보여서도 아니다. 어느 시기에 인생의 방향을 정하는 계기가 마련된 것으로 여기는 시인의 말이 역자의 가슴에 하나의 울림으로 와 닿았기 때문이다. 그 시기가 유·소년기나 청년기일 수도 있고, 그 계기가 책이 아니라 영화나 드라마일 수도 있고, 또 어느 누군가의 말이나 행동일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람에 따라서는 그런 특기(特記)할 시기나 계기가 전혀 없을 수도 있다.


역자는 초등학교 시절에 용돈을 털어 난생 처음으로 직접 책 한 권을 산 적이 있다. 어쩌면 그 책 한 권이 역자를 평생토록 공부하는 사람으로 만든 것은 아닐까고 생각해본 적이 상당히 여러 번이었는데, 이 시를 처음으로 읽던 그 순간에 역자의 생각이 틀림없다는 믿음을 거의 굳히게 되었다. 역자가 외울 정도로 여러 번 읽었던 그 책은 강소천 선생의 장편동화 ≪진달래와 철쭉≫이었다. 학교 도서관에서 몇 번 빌려보았던 책이지만 어린 마음에도 나만 매번 빌려볼 수는 없다고 생각하여 아끼고 아껴두었던 용돈으로 사게 되었던 것이다. 고향 집에서 그 책이 없어진지 이미 오래되었지만, 지금도 눈만 감으면 그 동화책 한 쪽 한 쪽이 머릿속에 그림처럼 그려진다.


역자는 이 시에서의 ‘화요일’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였다. 그 때문에 두루뭉술하게 ‘세월(歲月)’이라는 말로 한역(漢譯)할 수밖에 없었다. 시인이 ‘화요일’이라고 특정한 데는 무언가 특별한 사연이 있었을 법하다. 아무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본인이 다닌 초등학교를 기차에서 내려다보며 시인이 일으킨 감회는, 단순히 유·소년 시절의 추억을 소환하는 보통의 경우와는 사뭇 다르다.


초등학교 교실에서 책을 열었다는 것은 공부를 열심히 했다는 뜻이거나 글쓰기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시인이자 학자의 길로 들어서서> 시 쓰기와 글쓰기로 인해 무거운 언어의 짐을 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시인이 시인이자 학자의 길로 들어서지 않았다면 무거운 언어의 짐은 면할 수 있었을지 몰라도 또 다른 짐을 면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사람이면 누구나 인생을 살며 감당해야 할 자기 몫의 짐이 있기 때문이다.


시인이 얘기한 ‘무거운 언어의 짐’과 함께 생각해볼 만한 것으로 ‘글빚’을 들 수 있다. ‘누군가의 청탁이 있었지만 아직까지 탈고(脫稿)하지 못한 글을 이르는 말’인 이 글빚은 본인이 아니면 거의 누구도, 또 무엇으로도 대신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금전(金錢)의 빚과는 차원이 다르다. 시인이 쓰고자 했던 시나 논문 등이 이 범주에 들어 ‘무거운 언어의 짐’이 되기도 했을 것이다.


지금은 이 땅에 계시지 않는 한당(閒堂) 차주환(車柱環) 선생님께서 정년퇴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퇴임하고 나서 가장 좋은 일이 무엇인지 역자가 여쭈었더니 선생님께서는, “시간이 많아 글빚을 질 일이 없다는 것”이라고 하셨다. 역자가 은사님께 여전히 부끄러운 것은, 자유인으로 살면서도 글빚에 숱하게 졸려왔기 때문이다. 선생님께서는 저 하늘에서도 이토록 빛나는 계절을 맞아 시간에 쫓기지 않는 글을 쓰고 계실까?


역자는 2연 6행으로 된 원시를 10구의 칠언고시로 한역하였다. 원시의 행수(行數)에 비해 한역시의 구수(句數)가 늘어난 것은 기본적으로 한역의 편의를 도모한 때문이다. 한역시는 짝수 구마다 압운하였지만 후반 4구는 운을 달리하였다. 이 시의 압운자는 ‘座(좌)’·‘裹(과)’·‘過(과)’,‘書(서)’·‘居(거)’이다.


2020. 10. 6.


강성위 한경닷컴 칼럼니스트(hanshi@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