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은 인류 역사에 지울 수 없는 혼돈과 혼란의 해로 기억될 것입니다. 코로나로 촉발된 이 위험은 그동안 인류가 누려왔던 익숙함을 철저하게 파괴할 뿐 아니라,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송두리째 바꿔버린 사건으로 기록되지 않을까요? 우스갯소리로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상식은 바뀔지도 모르겠습니다. 코로나와 같은 감염병 앞에선 뭉치면 죽고 흩어져야 살 수 있으니까요. 현존하는 코로나 대응법 중에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마스크 착용과 철저한 거리 두기, 손 씻기 등입니다. 최 첨단을 걷는 시대적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지극히 아날로그적 방식인 이 방법이 최선이라니, 세상은 요지경이란 말이 실감 납니다. 설령 백신이 나와도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은 어렵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인류는, 또 한 번의 커다란 변화에 직면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접촉하지 마라

한 마디로 모이지 말고, 만나지 말라는 뜻이겠죠.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고대 철학자의 말을 무색게 하는 요구이기도 합니다. 인류의 역사는 접촉을 통해 발전해왔는데, 접촉을 통제한다는 것은 인간의 본능을 억제시키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인위적 통제는 영원한 구속력을 가질 수 없습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스스로 통제하던 것을 뿌리치고 자유롭게 활보하고 싶은 갈망 때문이죠. 개인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조금씩 자기 통제가 허물어지기 시작하면, 결국엔 봇물이 터지듯 일거에 무너지는 일이 발생합니다. 실제로 통제 조치를 반대하는 시위가 지구촌 곳곳에서 일어나는 것만 보아도, 자기 통제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사람 간 교류의 제약이 심해지면 결국엔 경제 활동 사슬이 끊어지게 되고, 이는 가정 경제를 옥죄는 요인으로 치닫게 됩니다. 때문에 코로나가 위험한 감염병이라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통제에 항거하는 일이 벌어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연결하라

코로나가 확산된다고 해서 안 보고 살 순 없습니다. 어떤 방식이든 사람을 연결시켜야 합니다. 그래야 비즈니스가 가능해지니까요. 요즘 비 대면 콘텐츠를 생산하거나 비대면 활동을 돕는 기업은 대박이라고 할 만큼 호황을 누리고 있습니다. zoom이나 쿠팡이 좋은 예가 되겠죠. 반대로 대면 방식에 올인한 기업이나 소, 상공인들은 말 그대로 직격탄을 맞고 있는 상황입니다.

편승하라

사회적 변화는 거스를 수 없습니다. 대세를 주도할 수 없다면 편승이라도 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상황입니다. 필자는 보험사에서 처음 강의를 시작했는데 당시엔(1999년) OHP 필름을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파워포인트, 워드, 엑셀로 교안을 만들고 강의하는 일이 일반화되더군요. 그 와중에 인터넷 속도가 빨라지면서 다양한 정보를 활용하는 일이 가능해졌습니다. 그렇게 근 20여 년이 지난 지금, 난데없이 코로나 괴물이 등장하면서 대면 교육이 사라지고, 화상교육으로 대체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일반적으로 대면 교육은 50분 수업, 10분 휴식이 일반적인데, ZOOM을 활용한 비대면 교육은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이어폰을 끼고 듣는 사람의 피로도를 감안해서 한 타임을 50분씩 끌고 가는 것은 무리가 있었으니까요. 덕분에 한 타임을 20분 남짓으로 줄여달라는 요구를 받습니다. 교육만 아니라 사내 회의 문화도 바뀌었습니다. 굳이 한 자리에 모으지 않아도 화상을 통해 언제든 회의할 수 있습니다. 재택근무가 가능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겠죠. 이런 변화는 코로나 이전에도 이미 실행하고 있었지만 보편화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코로나가 발병하면서 급속히 당겨진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화(人+匕), 파(石+皮), 탈(月+兌)을 요구하는 코로나

化(되다 화)는, 사람(人)이 비수(匕)와 마주하고 있는 형상입니다. 비수(匕)는 본래 사람이 거꾸로 서 있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으로 죽음을 뜻하지만, 저는 칼로 해석할 생각입니다. 칼은 뼈와 살을 분리하거나 조리할 때 사용하는 도구로, 사용자(人) 의도에 따라 그 용도가 달라집니다. 진정한 변화는 고통을 수반합니다. 그렇다면 비(匕)는 인간을(人) 개조하는 고통의 도구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破(깰파)는, 돌(石)과 표피(皮)가 붙어 있다가 떨어져 나왔다는 뜻입니다. 이는 원형이 파괴되어 서로 분리되는 것을 표현할 때 사용합니다. 분리된 다는 것은 각자의 길을 가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익숙하지 않은 환경을 스스로 극복해야 하는 책임이 뒤따른다고 할 수 있겠죠. 역시 두렵고 떨리는 일입니다.

脫(벗을 탈)은, 살이나 몸을 뜻하는 육달월(月=肉)에, 兌(바꿀 태 → 탈)가 붙은 것으로, 살에서 뼈를 제거하거나, 탈피(脫皮)처럼 껍질을 벗는다는 뜻으로 사용됩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오른발 무릎 아래쪽 복합 골절을 당해 수술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어찌나 아픈지 수술을 대기하는 3일간 원 없이 울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부기가 빠져야 수술을 한다고 해서 말이죠. 열아홉 살 때니까 얼추 40년 전 일이네요. 하물며 살에서 뼈를 제거한다면 그 고통은 또 얼마나 될까요, 모르긴 해도 뼈가 부러진 고통은 아무것도 아닐 겁니다. 하물며 스스로 껍질을 벗는 일은, 상상 이상의 고통이 뒤따르지 않을까요, 오죽하면 농민 작가 전우익 선생은 그의 책 『혼자만 잘 살면 무슨 재민 겨』 에서 탈피 탈각(脫皮脫殼)을 못하면 주검이라고 했을까요. 그러고 보면 코로나 바이러스는 인류가 얼마나 교만하고 나약한 존재인지 깨닫게 하는 화(化), 파(破). 탈(脫)의 화신(化身) 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입장에서 볼 때 그동안 군사적으로 경제적으로 큰소리쳤던 국가들이 얼마나 우습게 보였을지 상상이 갑니다. 미국, 유럽, 중국, 일본 가릴 것 없이 소위 지구촌을 좌지우지하는 국가들이 코로나에 속수무책 나가떨어지고 있으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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