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시, 한시로 만나다] 사랑할 때는, 윤준경

사랑할 때는



윤준경



사랑할 때는


불도 끄지 못했네


사랑할 때는


잠도 들지 못했네


사랑할 때는


꽃도 못 보고


사랑밖에는 아무것도


못했네



사랑 엎지를까 봐


모로 눕지도 못했네


뒤도 돌아보지 못했네



그대만 보고 가다가


넘어진 줄도 몰랐네



[태헌의 한역]


愛君時(애군시)



吾愛君時不熄燈(오애군시불식등)


吾愛君時不成睡(오애군시불성수)


吾愛君時不看花(오애군시불간화)


愛外諸事總不遂(애외제사총불수)



吾恐愛覆不側臥(오공애복불측와)


吾恐愛覆不後顧(오공애복불후고)


日日唯瞻君而行(일일유첨군이행)


全然不知吾身仆(전연부지오신부)



[주석]


* 愛君時(애군시) : 그대 사랑할 때(는). ‘君’은 아래의 ‘吾(오)’와 함께 시구(詩句)의 의미의 완결성을 위하여 역자가 임의로 보충한 시어(詩語)이다.


吾(오) : 나. / 不熄燈(불식등) : 불을 끄지 않다, 불을 끄지 못하다.


不成睡(불성수) : 잠을 이루지 못하다.


不看花(불간화) : 꽃을 보지 못하다.


愛外諸事(애외제사) : 사랑 외의 여러 일들. 편의상 ‘사랑 밖에는 아무 일도’로 번역하였다. / 總不遂(총불수) : 모두 다 하지 못하다.


吾恐(오공) : 내가 ~을 걱정하다. 의미의 완결성을 위하여 역자가 보충한 시어이다. / 愛覆(애복) : 사랑이 엎질러지다, 사랑이 쏟기다, 사랑이 무너지다. / 不側臥(불측와) : 모로 눕지 못하다.


不後顧(불후고) : 뒤 돌아보지 못하다. ‘後顧’는 ‘顧後’와 같은 의미이며, 압운 때문에 도치되었다.


日日(일일) : 날마다. / 唯(유) : 오직, 다만. / 瞻君而行(첨군이행) : 그대를 (쳐다)보며 가다.


全然(전연) : 전혀, 도무지. 역시의 행문(行文)을 고려하여 보충한 시어이다. / 不知(부지) : ~을 알지 못하다. / 吾身仆(오신부) : 내 몸이 넘어지다.



[직역]


그대 사랑할 때는



내 그대 사랑할 때는 불도 못 껐네


내 그대 사랑할 때는 잠도 못 들었네


내 그대 사랑할 때는 꽃도 못 보았고


사랑밖에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네



사랑 쏟길까 걱정해 모로도 못 누웠네


사랑 쏟길까 걱정해 뒤도 못 돌아봤네


날마다 그저 그대만 보고 가다가


내 몸 넘어진 것도 전혀 알지 못했네



[한역 노트]


누군가를 좋아하는 감정은 더할 수 없는 즐거움이면서 또한 괴로움이다. ‘사랑’의 즐거움이야 굳이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지만, 그 괴로움은 사랑이 불현듯 꿈처럼 깨버리거나 신기루처럼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걱정에서 비롯되었을 공산이 크다. 시인은 (자기가) 사랑을 엎지를까 봐 모로 눕지도 못하고, 뒤도 돌아보지 못했다고 하였다. 사춘기 소녀적인 감수성이 물씬 느껴지는 표현이긴 하지만, 이러한 조바심이 사춘기 소녀에게만 국한되는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감정이 마음속에 싹트면 일단 일상생활부터 달라지는 것이 보통일 듯하다. 불을 끄면 갑갑해서 질식할 것만 같아 불도 못 끄고, 불도 못 끄니 잠도 쉬이 이루지 못할 것이 뻔하다. 급기야 꽃은 물론 꽃처럼 아름다운 것이 세상에 널려있어도 도무지 눈에 들어오지가 않는다. 이른바 ‘콩깍지’ 효과이다. 이 때문에 사랑을 일종의 정신병으로 간주하는 훈수꾼들이 옆에서 제 아무리 조언을 쏟아도, 정작 사랑에 빠진 당사자에게는 쇠귀에 경 읽기가 될 뿐이다.


넘어진 줄도 몰랐다는 말은 당연히 깊이 빠져들고 말았다는 뜻이겠지만, 이는 다쳐도 아픈 줄을 몰랐다는 말과 그리 다르지 않다. 이쯤에서 우리는 사랑이야 말로 최면 효과와 진통 효과가 가장 큰 명약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누군가에 대한 사랑이 가슴 속에 인으로 박히지 않았다면 그러한 절절함이 어찌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어찌 사람에 대한 사랑만이 사랑일까? 진리에 대한, 정의에 대한 사랑 역시 사랑이다. 역자는 이런 것에 대한 사랑이 이즈음만큼 간절한 때가 또 있었던가 싶다. 우리는 언제까지 가치가 전도(顚倒)된 혼돈의 시대를 살아야만 하는 것일까? 세상을 미리 알고 정한 신(神)이 있어, 그 신을 마주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역자는 무엇보다 먼저 이것부터 물어보고 싶다.


3연 13행으로 이루어진 원시를 역자는 8구의 칠언고시로 한역하였다. 역자가 이 시를 한역하는 과정에서 원시에는 없는 몇몇 시어들을 반복적으로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표현의 난점 때문이 아니라 우리말과 한문(漢文) 사이에 도드라지는 문장 결구(結構)의 생리가 확연히 다른 때문이었다. 그리고 또 한역시의 행문을 고려하여 몇몇 시어를 보충하기도 하였다. 한역시는 짝수 구 끝에 압운하였는데, 후반부에서 운을 바꾸었다. 그리하여 이 한역시의 압운자는 ‘睡(수)’·‘遂(수)’, ‘顧(고)’·‘仆(부)’가 된다.


2020. 8. 4.


강성위 한경닷컴 칼럼니스트(hanshi@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