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현재 박사논문을 쓰고 있다. 심사일을 일주일 남겨두고 열심히 논문과 씨름을 하고 있다.

마음은 무척 바쁜데, 진도는 매우 더디다. 어떻게 빨리 끝낼 수 있을까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 때 움베르토 에코의 [논문 잘 쓰는 방법]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에코는 자신이 논문을 쓸 때 해결되지 않는 문제에 대해서 고민하다가

우연히 헌책 손수레에서 자그만 책자를 발견하고 그것을 사서 읽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 때는 학문적 겸손 때문이 아니라 단지 고집이나 투자한 돈을 회수하기 위해서였다고 고백한다.

어느 지점에선인가. 논문의 열쇠를 발견한 것이다.

그 알려지지 않는 발레수사는 이미 백여년 전에 죽었고 아무도 그에 대해 연구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인 사람에게 무엇인가 가르쳐 줄 것이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학문적 겸손이다. 누구든지 우리에게 무엇인가 가르쳐 줄 수 있다.

아마도 우리들 자신이 현명하다면, 우리보다 현명하지 못한 사람에게도 무엇인가 배울 수 있다.

또는 그다지 현명해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도 무엇인가 배울 수 있다.

또는 그다지 현명해 보이지 않는 사람도 어떤 감추어진 자질들을 갖고 있다.

또한 갑에 대해서 훌륭하지 못한 사람이 을에 대해서 훌륭할 수도 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이다.

문제는 누구의 말이든지 겸손하게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p.171)

필자는 많은 코치들을 만난다. 그들 중에 CEO코치 중 몇분은 정말 저분이 코치일까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정작 자신이 코치이면서도 남의 이야기에 겸손하게 들는 분을 만나기 힘들다는 것은 왜 일까?

그들이 갖고 있는 지위에서일까? 아니면 남들이 떠받들어주는 아부에 길들여서일까?

정작 남들을 코칭하면서 자신에 대한 코칭을 못하는 CEO코치가 안타까울 때가 많다.

누군가에게 코칭을 해주기 전에 생각해볼 것이 있다.





필자가 얼마전 한국경제신문에서 읽다가 발견한 시를 소개한다. 어떻게 하면 헛되이 살지 않고 갈 것인가?를 끊임없는 자문을 만들어주는 시다.


만약 내가 한 사람의 가슴앓이를 멈추게 할 수 있다면

나 헛되이 사는 것은 아니리.

만약 내가 누군가의 아픔을 쓰다듬어 줄 수 있다면

혹은 고통 하나를 가라앉힐 수 있다면

혹은 기진맥진 지친 한 마리 울새를

둥지로 되돌아가게 할 수 있다면

나 헛되이 사는 것은 아니리.


– 에밀리 E 디킨슨의 <만약 내가(If I can)> 전문

이 시는 고인이 되신 서강대 장영희 교수님이 애송시라고 한다.

코칭(coaching)이라는 들어주는 것뿐만 아니라 가슴앓이를 멈추게 할 수 있는 메시징을 해야 하며,
아픔을 쓰다듬어주는 인정을 해야 하며,

고통 하나를 가라앉힐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해야 하며,

지친 사람을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깨닫게 해줘야 한다는 점에서 코칭을 대변하는 시라고 생각된다.

학문적 겸손과 태도를 배우게 한다는 점에서 한번 되새김질 할만한 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