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시, 한시로 만나다] 어떤 그림, 김부조

어떤 그림



김부조



꽃을 그리자


나비가 왔다



나무를 그리자


새들이 왔다



너를 그리자


그리움이 왔다



너를 그리자


사랑이 왔다



[태헌의 한역(漢譯)]


某畵(모화)



畵花蝴蝶來(화화호접래)


畵樹禽鳥來(화수금조래)


畵汝思念來(화여사념래)


懷汝戀情來(회여연정래)



[직역]


어떤 그림



꽃을 그리자 나비가 왔다


나무를 그리자 새들이 왔다


너를 그리자 그리움이 왔다


너를 그리자 사랑이 왔다



[주석]


* 某畵(모화) : 어떤 그림.


畵(화) : (동사적으로 사용하여) ~을 그리다. / 花(화) : 꽃. / 蝴蝶(호접) : 나비. / 來(래) : 오다.


樹(수) : 나무. / 禽鳥(금조) : 새, 새들.


汝(여) : 너, 그대. / 思念(사념) : 그리움.


懷(회) : ~을 그리워하다, ~을 그리다. / 戀情(연정) : 사랑.



[한역 노트]


짧고 간단하여도 참으로 예쁜 시이다. 이런 시가 우리에게 주는 위안은, 물질이 주는 그것과는 애초에 지평(地平)이 다르다고 할 수 있겠다. 한 때 중국을 ‘시의 나라[詩國]’라고 하였지만, 전철역에만 가면 언제든지 시를 만날 수 있는 우리나라야 말로 바로 이 시대 ‘시의 나라’가 아닐까 싶다.


역자는 이 시를, 어느 전철역에서 환승하기 위하여 멍하니 서서 전철을 기다리다가 우연히 만났다. 아, 그 순간 어찌나 반갑고 기쁘던지! 전철이 도착하기 까지는 다소 남겨진 시간이 있어 사진으로 찍어 저장하는 대신에 바로 메모를 하였는데, 행선지를 향하던 전철 객실 안에서 역자는 선 채로 이 시의 한역(漢譯)을 완료하였다. 그게 벌써 작년 가을의 일이다. 그런데 이 봄에 다시 꺼내 감상할 수 있게 되었으니, 역자에게는 꼬깃꼬깃 접어 아껴두었다가 꺼내 쓰는 비상금처럼 고맙기만 하다.


아직 꽃피고 벌·나비 날아다닐 봄은 멀리 있지만, 올해만큼 간절히 봄이 기다려진 적도 별로 없었던 듯하다. 지난겨울에 급속히 유행한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가 여전히 맹위를 떨치는 가운데, 꽃샘추위까지 주변을 맴돌아 몸이 움츠러들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추워도 봄은 반드시 오고, 또 그 어떤 바이러스도 언젠가는 반드시 소멸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자가 지금 봄의 멱살이라도 잡아끌며 데리고 오고 싶은 까닭은, 역자의 태(胎)를 묻은 땅과 역자의 지인들이 많은 땅이 그 바이러스로 더할 수 없는 고통을 겪는 때문이다.


실락(失樂)의 시기를 지나는 이런 때일수록 우리는 가슴을 더 넓게 열고, 마음을 더 밝게 해야 한다. 봄은, 권력의 영토 계산에 여념이 없는 정치인들이 만들어서 우리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꽃이 피고 나비 날고 새가 나무에서 노래하는 봄이 오면, 우리는 우리의 봄을 맛깔나게 빚어가도록 하자. 봄을 맞아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는 게 또 무슨 허물이 되겠는가!


4연 8행으로 이루어진 원시를 역자는 오언 사구의 고시로 한역하였는데 매구마다 같은 글자 ‘來(래)’로 압운하였다.


2020. 3. 10.


강성위 한경닷컴 칼럼니스트(hanshi@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