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 법인에서 대출업무를 하던 2015년 당시 우리 회사가 제시하던 미 달러화와 인도네시아 루피아화 대출 금리 차이는 약 6~7%p 정도였다. 글로벌 저금리 기조 속에 달러금리는 낮고, 루피아 대출금리는 연 10%가 넘었던 것이다. 나중에 금리 차이는 좀 좁혀지긴 했지만 루피아화 대비 달러화 명목 대출금리가 눈에 띄게 낮은 현상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이 와중에 한국계 기업들과 현지기업들이 대출 의사결정에서 금리와 환율을 대하는 자세가 달랐다. 한국계 기업은 외화 수입(收入)이 있어 외화 대출이 가능한 경우는 물론이고 그렇지 않아 원칙상 달러화 대출이 어려운 경우에도 대부분 달러화 대출을 원했다. 명목금리가 낮기 때문이다. 이해가 가는 측면이 있다. 수익성이 웬만큼 높은 사업이 아니고서야 루피아화로 대출을 받아 연 10% 이상 이자를 내는 것은 부담으로 느껴질 수 있다.

그런데 현지기업 경영자들은 외화 대출을 받을 요건이 되는 경우에도 루피아화 대출을 선호하는 경우가 많았다. 현지화 대출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분위기마저 느껴졌다. 수입의 대부분이 현지화로 발생하는 경우 부채도 현지화로 가져가는 것이 리스크관리 차원에서 바람직한 결정이기는 하다. 그래도 한 번 물어 보았다. 금리차가 이렇게 큰데도, 이자비용으로 10% 이상을 내야 하는데도 괜찮은지 말이다. 대부분 괜찮다고 답했다. 인도네시아에서 사업을 하면서 수입이 현지 통화로 발생하는 상황에서 외화 부채를 내어 불필요한 외환가치변동 위험을 지기 보다는 환율로 인한 변동성을 줄여서 이익규모를 안정적으로 가져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신선했다. 불필요한 위험을 회피하고 안정적인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 10%가 넘는 이자비용을 기꺼이 감수하다니! 위험관리차원에서는 교과서 같은 바람직한 자세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십년도 더 된 얘기이지만 국내에서는 일본엔화 표시 자산이나 수입이 없는 기업들이 금리가 낮다는 이유로 엔화대출을 받았다가 엔화가 강세로 전환해 어려움을 겪었던 일도 있다. 엔화 가치 상승분이 저금리로 인한 절약분을 훨씬 상회했던 것이다. 심지어는 일본 사업과는 전혀 관계없는 병원에서 엔화대출을 받아 의료장비 등을 구입했다가 곤란해진 일도 있었다.

외화 수입이 없는데도 외화대출을 강력하게 원하는 경우를 보면 대출기간 동안 환율이 어느 정도 예상을 크게 뛰어넘지 않는 수준에서 변할 것이라는 기대가 깔려 있다. 이런 기대는 달러화와 루피아화 사이의 환율을 꽤 오랜 기간 동안 관찰하면서 형성되었을 것이다. 반대로 현지 기업인들은 대출 의사결정을 할 때 환율변동에 대한 베팅 자체를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경우들이 많았다. 환율 움직임을 관찰한 기간으로 보면 현지 기업인들이 훨씬 더 길긴 했을 것이다.

인도네시아 경제사를 보면 크고 작은 위기의 연속이다. 1998년 외환위기가 가장 먼저 떠오르지만 이게 다가 아니다. 정치적 격변이 있던 1965년 즈음은 경제적으로도 격변이었다. 재정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며 통화공급량은 폭증하였다. 1962년부터 174%를 기록하던 물가상승률은 1965년에는 594%, 1966년에는 635%를 기록하였다. 화폐가치가 급락해 급기야 1965년에는 리디노미네이션까지 단행해야 했다. 이후에도 인도네시아 경제를 보면 식량위기, 국영기업체와 금융기관의 경영위기 등 위기가 없던 해를 찾아보기 어렵다. 90년대말 금융위기 때는 2,500루피아/달러 수준이던 환율이 17,000루피아/달러 대를 찍고 이후 달러당 9,000~11,000루피아 범위에서 안정되기도 하였다. 지금도 인도네시아 경제는 변동성이 크지만 외환위기 이전과 비교하면 오히려 안정적인 편이다.

인도네시아에서 터를 잡고 오랫동안 사업을 한 현지 기업인에게는 이 위기의 순간들을 헤쳐나온 기억이 있는 것 같다. 예상을 뛰어넘는 최악의 순간을 수도 없이 뚫고 나오면서 언제든 또다시 최악의 순간이 닥쳐올 수 있다고 생각하고 이를 대비하는 것이다.

물론 인도네시아에서 사업을 영위하는 우리 기업인들도 위기에 대비한다. 하지만 때로는 우리가 생각하는 ‘위기’와 ‘최악’이 인도네시아 기업인들이 생각하는 ‘위기’와 ‘최악’에 미치지 못할 때가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우리도 외환위기 때 환율 폭등을 경험했지만 인도네시아처럼 700% 가까운 상승은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인도네시아 기업인들은 때로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최악의 상황을 상정한다. 2015년 중반 대(對) 달러 루피아 환율이 상승해 달러당 14,000 루피아를 상향 돌파한 적이 있었다. 당시 화교 사업가들을 중심으로는 환율이 달러당 17,000 루피아를 넘을 수도 있으며 심리적 저지선이 무너지면 20,000 루피아에 육박할 수도 있다는 얘기도 심심치 않게 나왔다. 뚜껑을 열어보니 연말 환율은 오히려 13,000루피아/달러 수준 아래로 떨어지며 안정세를 보였다. 보통 이런 식이다. 시간이 지나고 보면 왠 호들갑이었나 싶을 정도로 비관적인 전망들이 쏟아진다. 이런 극도의 비관적 전망은 실현되지 않는 경우들이 더 많다. 그런데 비슷한 상황이 닥치면 또 똑같을 것이다. 항상 최악의 상황이 닥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이에 대비하는 것이다.

아마도 이런 자세는 변동성이 매우 컸던 환경 속에 기업을 경영하며 자연스럽게 형성된 유전자 같은 것이 아닌가 한다. 불필요한 위험을 지지 않음으로 경영과 관련한 변수는 최소화하고, 사업에 필수적인 위험을 관리하는데 역량을 집중하겠다는 자세이다.

무역전쟁 등으로 인한 글로벌 경제 위기 가능성이 거론되더니 이제는 코로나-19발 쇼크에 대한 우려도 크다. 글로벌 경기 변동에 따라 인도네시아 경제도 크게 영향을 받을 것이다.  인도네시아는 사업에 따른 기회도 많지만 위험도 큰 곳이다. 오랫동안 인도네시아에서 사업을 하며 산전수전 다 겪은 현지 사업가들이 위험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보며 현지에서 위험관리를 어떻게 할지 실마리를 얻을 수도 있을 것 같다.

* 위 내용은 필자 소속기관의 견해를 반영하지 않습니다.

양동철 한경닷컴 칼럼니스트 / 한국수출입은행(crosus@koreaexim.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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