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작년 여름, 친구와 함께 4차 산업혁명을 주제로 열린 강연회에 참석할 기회가 생겼다. 별생각 없이 갔던 강연에서 큰 충격을 받았고 두서없는 생각과 질문이 한동안 머릿속을 떠다녔다. 책과 방송으로만 만났던 정재승 박사의 강연은 특히 인상적이었다. 전공 분야인 뇌과학과 연결 지어 미래사회를 예견하고 비전을 제시해 주어서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강연을 듣는 와중에 문득 영화 <그녀>가 떠올랐다.
[책과 영화에 기대어 쓰다] <그녀> 당신이라는 책
영화 <그녀>의 주인공 테오도르는 고객의 마음을 대신해서 편지를 써주는 유능한 편지 대필 작가다. 하지만 정작 아내의 마음을 읽지 못한 그는 아내 캐서린과 별거를 한 뒤 외롭고 공허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어느 날 테오도르는 새롭게 생산된 인공지능 체계 OS1을 구입한다. 고객의 요구에 맞추기 위해 인공지능이 제시하는 몇 가지 질문에 성실하게 답을 한 뒤 그가 만나게 된 상대는 사만다였다. 정재승 박사의 연구 분야이기도 한 인공지능 운영 시스템인 사만다와 인간 테오도르와의 만남은 관계와 사랑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 앞에 서게 한다.

테오도르가 사만다에게 끌린 이유는 캐서린과의 관계에서 받은 상처 때문이었다. 더 이상 상처받을 필요도 없고 복잡한 심리전을 치르느라 에너지가 고갈될 염려도 없는 사만다에게 테오도르는 금방 호감을 느끼게 된다. 위로받고 싶을 때, 속내를 털어놓고 싶을 때 테오도르는 버튼 하나로 사만다를 불러낸다. 그녀는 좋은 친구이자 연인으로 상처받은 마음을 위로해 주었다. 외로울 땐 테오도르의 곁을 지켰고 바쁘거나 불편감이 느껴지면 바로 사라져 주었다. 사만다는 상대를 비난하지 않고 불편한 얘기는 피해 가도록 설계된 OS였기 때문이었다.

사만다는 테오도르에게 일종의 심리적 안전지대였다. 힘들면 도피하는 안식처였다. 둘의 관계는 주체와 주체 간의 온전한 만남이라기보다는 주체와 객체로서의 만남에 더 가까웠다. 시간이 지나면서 두 사람의 사랑은 그 양상이 바뀌기 시작한다. 어느 순간 사만다는 테오도르를 욕망하게 되고 급기야 실체가 없는 자신을 대신해 줄 이사벨라를 데려와 대리 섹스를 하기에 이른다. 객체로서 테오도르에게 충실히 맞춰주기만 하던 사만다가 어느 순간 주체로서 자아를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서로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한 사람의 주체로 바라볼 줄 아는 것이 성숙한 사랑이다. 하지만 테오도르는 사만다를 만나기 전까지 주체로서 상대를 바라볼 줄 몰랐다. “나한테는 우울증 약을 주더니 컴퓨터와 데이트한다”라고 일갈하던 캐서린의 말속에는 테오도르에게 받은 상처와 원망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하지만 사만다와의 사랑도 결국 한계에 부딪치게 된다. 수천 명과 교제 중이며 당신이 641번째 사랑이라고 털어놓는 말을 듣는 순간 테오도르는 절망하게 된다. 유일한 한 사람에서 무수한 사람 중의 하나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다. 특별한 존재라고 믿었던 자신이 보통의 존재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누구라도 쉬운 일이 아니다. 태생적으로 한 사람과의 관계가 불가능한 사만다에게 테오도르는 결코 유일한 한 사람이 될 수 없었다. 그녀를 온전히 독점하고 싶었지만 인공지능 시스템인 사만다와는 그런 사랑이 불가능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연인에게 유일무이하고 대체 불가능한 존재가 되기를 바란다. 상대를 온전히 독점하고자 하는 욕망이 사랑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이제 테오도르와 사만다의 관계는 역전된다. 테오도르가 주체로 시작한 사랑의 저울은 사만다에게로 눈금이 기울어지기 시작한다.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불리할 수밖에 없는 것이 사랑의 역학관계이다. 저울은 이미 사만다에게로 기울어지기 시작했고 테오도르가 경험했던 둘만의 세계는 서서히 종말을 향해 간다.

결국 사만다는 “당신이란 책 속에 갇힐 수는 없다‘는 말을 남기고 그를 떠난다. 사만다는 테오도르에게 ’너와 나는 다른 개체이고 서로 다른 세계에 속한 존재‘ 임을 일깨워 주었다. 사만다와 헤어진 뒤 테오도르는 마침내 캐더린을 향해 그동안 쓰지 못했던 편지를 부치게 된다.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테오도르가 비로소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를 내게 된 것이다. 서로를 할퀴고 아프게 하느라, 자신의 틀에 맞추려고 했던 아집 때문에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테오도르는 캐서린을 그 자체로 인정하고 받아줄 때 자신 역시 그녀에게 받아들여진다는 진실을 깨닫게 된다. 마침내 테오도르는 떠오르는 태양을 마주하기 위해 옥상에 오른다.

영화는 테오도르가 한 편의 편지를 완성하기까지의 여정이자 동시에 우리 앞에 도착한 길고 복잡한 사랑의 편지이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사만다가 말했듯이 ‘당신이라는 책을 읽는 것’과 같지 않을까. 결말이 예상된, 고정된 책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고 업그레이드는 되는 미완의 책 말이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사랑하는 이의 책을 다시 쓰고 고쳐 쓰고 덧붙여 쓰는 편집자이자 그 책의 열렬한 독자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한 권의 책을 함께 써 나가는 무수한 경험치가 모였을 때 비로소 ‘사랑’이라는 단어를 사용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오늘 나는 당신이라는 책 속에서 어떤 문장으로 새겨질까?
[책과 영화에 기대어 쓰다] <그녀> 당신이라는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