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저 리그에서(이하 MLB) “제구력의 마술사”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투수가 있다. 그레그 매덕스가 그 주인공이다.
[이종범의 셀프리더십] 상처 끝에 얻은 영광(就)
그는 초 일류급 제구력을 지닌 투수로 MLB 최초 4년 연속 사이영 상을 수상했고, 17년 연속 15승 이상 달성했으며 18번의 골든 글러브를 수상했던 엄청난 투수다.

제구력은 투수에게 가장 중요한 능력이다. 아무리 구속이 빨라도 스트라이크를 잡을 수 없다면 투수라고 할 수 없다. 반대로 구속은 느리지만 자신이 원하는 공간으로 공을 던질 수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래서일까, 매덕스가 했던 말에서 특별한 무게가 느껴진다.

“바깥쪽 낮게 제구 할 수 있다면 그게 바로 영리한 투수이다”

2019년 MLB에서 제구력의 마술사를 소환한 선수가 있다. 류현진이다. 한마디로 만화 같은 시즌을 보내고 있다. 자신의 성적에 대해서 스스로 만족하다고 인정할 만큼 대단한 전반기였다.

“내 전반기 점수는 99점 주고 싶다”

11승 2패. 승수도 승수지만 지금까지 규정이닝을 채운 MLB 투수 중 1점대 평균 자책점을 유지하고 있는 유일한 선수다(1.53) 불 같은 강속구가 아님에도, 같은 투구 동작으로 포심, 투심, 커터, 체인지업, 그리고 커브를 구사한다는 점은 경쟁하는 선수들과 확실하게 비교되는 능력이다. 더 놀라운 것은 모든 구종을 자신이 맘먹은 곳으로 던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같은 구종이라도 자유자재로 구속을 변화시키는 능력 또한 특출하다. 현재의 페이스는 사이영 상 1순위로 거론될 만큼 순항 중이다. 전 세계에서 야구를 가장 잘하는 괴물들이 넘쳐나는 MLB에서 말이다.

『리더를 위한 한자 인문학』에 이런 글이 있다.

“순풍에 돛 달고 ‘노 저어라, 노 저어라’ 하며 나아가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역풍을 맞으면서도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다.’ 저 높은 성’은 나의 꿈이고 목표일 것이다. 고단하고 고통스럽더라도 역풍을 맞아가며 무소의 뿔처럼 뚜벅뚜벅 한 발을 내딛는, 아니 발을 질질 끌더라도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거룩한 결연함이 취(就)에는 담겨 있다”

就(이룰 취) = 京(서울 경_높은 건물) + 尤(더욱 우_상처 난 손)

류현진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투수에게 공을 던지는 팔은 목숨과도 같은 것이다. 그는 MLB에 도전한 이래 크고 작은 부상에 시달려 왔다. 데뷔 후 두 시즌은 투수로서 능력을 인정받을 만큼 좋았다. 하지만 MLB 연착륙은 쉽지 않았다. 크고 작은 부상이 그의 순항을 가로막기 시작한 것이다. 그중에서도 2015년 관절 와순 파열은 그의 야구 인생을 끝장 낼 수 있는 위기로 다가왔다. 관절 와순 수술 후 성공적으로 재기한 사례가 많지 않은 현실에서, 야구 인생을 건 수술을 선택한다. 본래의 기량을 회복할 수 있다는 희망보다는 절망이 더 지배적인 상황에서, 스스로 이겨내야 하는 외로운 싸움을 선택한 것이다. 자신의 건강을 증명하지 못하면 MLB 생활은 거기 까지다. 돌이켜 보면 그의 이름은 입단 후 2년간 반짝 빛났다. 하지만 순식간에 사라지는 별동 별처럼 LA의 어느 하늘 아래 조용히 잊히는 선수로 남을 수 있었다. 수많은 선수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는 달랐다. 재활의 시간을 기회의 시간으로 되돌리기 위한 사투를 벌였다.

2016년 7월 복귀 전

아직 고난의 시간이 끝나지 않은 것일까, 한 경기만 던지고 다시 팔꿈치 부상으로 수술대에 오르는 비운을 맞는다(1경기, 4.2이닝, 1패, 평균 자책점 11.57)

또다시 이어진 수술과 재활, 그리고 2017년 다시 마운드에 오르지만 성적은 기대 이하다.  5승 9패, 평균 자책점은 3.77이다. 포스트 시즌 엔트리에서도 감독의 부름을 받지 못한 채 시즌을 마친다.

2018년의 류현진

그는 이전과 다른 면모를 보이기 시작한다. 허벅지 부상이 있었지만 15경기에 출장해서 7승 3패(2018년, 평균자책점 1.97)라는 준수한 기록을 보이며 다시 살아나기 시작한다

드디어 2019년.

2018년 하반기부터 살아나기 시작한 류현진은 2019년 시즌에서 결국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FA 대상자임에도 LAD의 퀄리 파잉 오퍼를 받아들인 그는 과거의 류현진이 아니었다. 팔색조의 공을 뿌리는 MLB 최고의 투수가 되어 돌아온 것이다. 잦은 부상과 수술, 그리고 이어지는 재활, 건강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 속에서도 묵묵히 자신의 몸을 만들었고, 코치진에서 분석한 자료에 의존하던 패턴에서 벗어나 스스로 상대팀 타자를 분석하는 변화가 나타났다. 류현진의 강점으로 평가받았던 든든한 배짱, 위기상황에도 흔들리지 않는 평정심을 바탕으로 포심, 투심, 커터, 체인지업, 커브 등 자신이 던질 수 있는 모든 구종을 결정구로 쓸 만큼 투구 능력도 끌어올렸다.

투수의 생명을 끝낼 수 있는 부상(尤)을 극복하면서 상대 타자들이 상대하고 싶지 않다고 말할 만큼 까다로운 팔색조 투수로(京) 인정받고 있다. 지금은 사이영 상 1순위로 거론될 만큼 미 전역에 그의 이름 석자가 각인된 전국구 스타가 되어있다.

그는 20승을 목표한다고 말했다(就) 아직 시즌 중이고, 건강한 몸을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의 목표가 이루어지는 2019를 응원한다.

세상엔 공짜가 없듯, 화려한 날도 그냥 얻어지는 선물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일까, 최인호 작가의 외침이 물러진 내 마음에 파문을 일으킨다.

“내가 쉽게 돈을 버는 베스트셀러 작가라고 함부로 말하지 말라. 내 오른손 중지에 잡힌 울퉁불퉁 딱딱한 굳은살 덩어리를 보면 그런 말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이종범 한경닷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