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영화에 기대어 쓰다] 영화 <소공녀>, 집보다 위스키
전 지인이 책 추천을 해 달라고 부탁했다. 반가운 마음에 평소 좋아했던 책을 서너 권 추천해 주었다. 반응이 궁금했지만 시간이 지나도 묵묵부답이었다. 한참 후 모임에서 얼굴을 마주한 지인의 말 “그 책은 제 취향이 아니더라구요. 지루하고 어렵기만 했어요” 순간 가벼운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어느 정도 보편성을 확보한 책이라 생각하고 추천했지만 내 생각과 달리 지인은 그 책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책 취향도 10인 10색, 제각각 이구나’ 거부당한 느낌이 들었지만 ‘다름’을 인정하는 것 또한 내가 배워야 할 인생수업 중 하나였다.



어렸을 때 읽었던 <소공녀>는 원래 부잣집에서 공주처럼 컸으나 갑작스러운 불행으로 기숙사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갖은 고난을 겪는 소녀의 이야기다. 그 와중에도 자존감을 잃지 않았던 소녀는 마침내 역경을 극복하고 예전의 삶으로 복귀하는데 성공한다. 어떤 환경에서도 ‘나다움’을 잃지 않았던 세라와 자신만의 취향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미소다움’을 지켰던 그녀는 자신을 옭아매는 사슬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 진정한 행복으로 가는 길임을 일찌감치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영화 <소공녀>의 주인공 미소의 직업은 가사도우미다. 학비가 없어 대학을 마치지 못했고 매일 쓰는 일기처럼 가계부를 써야 겨우 월세를 맞출 수 있다. 머리가 하얗게 새는 병이 있어 매일 먹어야 하는 한약 값도 남겨 두어야 한다. 집이 너무 추워서 남자 친구 한솔이와의 잠자리도 봄으로 미뤄야 할 판이지만 유일한 위안이자 휴식인 담배와 위스키가 있어 소소한 행복을 이어갈 수 있었다. 한솔은 생계를 위해 공장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처지지만 웹툰 작가의 꿈을 간직한 그를 위해 미소는 응원을 아끼지 않는다. 데이트 비용을 벌기 위해 나란히 누워 헌혈을 하고 초코파이 하나에 기뻐하는 가난한 연인이지만 둘 사이에는 각자의 취향을 존중하는 마음이 서로를 단단하게 이어주고 있었다. 하지만 새해가 되면서 월세가 오르고 담뱃값마저 인상된다. 가계부를 꺼내 놓고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집이 없어도 생각과 취향은 있어.”라는 말과 함께 위스키와 담배 대신 집을 포기하기로 한다. 그녀의 일당으로는 위스키와 담배, 월세방 모두를 가질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캐리어를 끌고 짐을 매단 채 미소는 과거 대학시절, 밴드 멤버였던 지인들을 찾아가며 하룻밤을 의탁하기로 한다.



친구 문영은 평균에서 밀려날까 두려워 제 팔뚝에 직접 포도당을 주사하며 회사생활을 하고 있었고, 피아노를 잘 쳤던 현정은 음식 솜씨가 없다는 시댁 식구들의 구박을 받으며 시집살이를 하고 있었다. 20년간 대출을 갚아야 하는 상황과 이혼 위기에 직면해서 대인기피증을 보이는 후배 대용, 부모 집에 얹혀살면서 억지 합방을 강요하는 노총각 선배 록이, 그리고 부잣집에 시집가 돈이라는 굴레에 갇힌 정미에 이르기까지. 어느 누구도 행복하지 않았고 저마다 지고 있는 삶의 무게에 눌린 하루하루는 위태로워 보였다. 가진 건 없지만 원하는 것을 분명히 알고 스스로의 취향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미소가 오히려 이들의 결핍을 채워주었다. 반찬 솜씨가 없는 친구를 대신해 밑반찬을 만들어 주었고 이혼을 앞둔 후배에게는 따뜻한 계란말이로 아침상을 차려주었다. 원하지 않는 임신으로 힘겨워 하는 의뢰인을 위해서는 “밥은 먹었냐?”라고 물은 뒤 따뜻한 닭백숙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평균적인 삶, 남들과 비슷한 삶을 위해 애쓰고 있었지만 옛 친구들은 하나같이 불안하고 공허한 삶 속에 놓여 있었다. 이들 눈에 비친 미소는 어땠을까? 가진 것도 없으면서 담배와 위스키만은 버리지 못하는, 세상 물정 모르는 한심한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 더 이상 꿈꿀 권리조차 허락되지 않은 청춘들은 다이소나 이케아에서 소소한 행복 거리를 찾아 방황한다. 하지만 이들은 ‘소확행’을 외치며 이솝우화 속 여우처럼 살아갈지언정 미소처럼 집을 포기하는 선택은 하지 않는다. 대학 선배였던 정미는 ‘염치없다’는 말로 미소의 취향을 폄하한다. 절약이 미덕이고, 자유보다는 책임의 가치를 존중하는 사회에서 정미의 일침은 설득력 있게 들린다. 하지만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사회가 만든 가치에 따라 개인의 취향에 값을 매기고 비교하는 행위는 과연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을까?



한솔은 결국 집 없이 떠도는 미소를 위해, 혹은 자신의 미래를 위해 사우디로 떠나기로 한다. 미소는 배신이라며 분노하지만 떠나는 그를 위해 꿈을 잃지 말라는 말로 서운함을 대신한다. 이후 카메라는 여전히 한 잔의 위스키에 기대어 생활하는 미소를 보여준다. 카메라가 스치고 지나간 미소의 머리는 하얗게 세어있다. 미소는 이제 집 외에 한약마저 포기한 것이었다. 한강 둔치에 터를 잡은 그녀의 텐트 사이로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왔다. 미소는 언제까지 램프의 불을 밝힐 수 있을까? 영화 초반 친구에게 얻은 쌀 봉지에 구멍이 나서 쌀이 줄줄 새던 장면이 떠올라 문득 불안감이 밀려왔지만 미래를 위해 현재를 저당 잡히지 않겠다는 미소의 소신은 뜻밖의 위안으로 다가왔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스크린에는 <소공녀>의 영문 제목이 함께 올라왔다. 생뚱맞게도 Little Princess 가 아닌 Microhabitat였다. ‘작은 것, 미생물들의 서식지’ 혹은 ‘미소가 사는 곳’쯤이 되지 않을까? 즉 ‘미소서식지’로 읽어도 무방할 터이다. 따라서 영화 속 미소의 이름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smile의 뜻이 아닐 수도 있었다. 감독의 재치에 슬며시 웃음이 났다. ‘나다움’을 지키기 위해 집을 포기한 여자 미소가 자신만의 Microhabitat에서 최소한의 존엄을 지키며 살아가길 빌어본다. 영화를 본 후 내 앞에 질문 하나가 당도했다 ‘내일을 위해 오늘 내가 포기한 것은 무엇인가?’
[책과 영화에 기대어 쓰다] 영화 <소공녀>, 집보다 위스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