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멱산 정상에서 내려오니 우거진 숲 속에 한강이 보인다. 흐르는 물속은 알 수 없지만 물길은 양천과 행주산성을 향해 서해로 흘러간다. 도성을 따라 걸으니 남소문터가 보인다. 그 옛날 도성 밖 한강진에 배를 탈 수 있는 가장 빠른 관문이었다. 남소문터는 장충동과 한남동의 경계로 험난한 고갯길이었다. 지금도 걸으면 숨이 헉헉 막히고 힘들다. 목멱산 아래 남소영이 있어 도성 안과 밖을 지켜온 사람들로 진을 치며 묵묵히 이어왔다. 장충동은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넓은 지역이다.


  우리나라 최초 국립극장과 최고급 호텔이 도성 안에 있다. 소나무 우거진 국궁의 요람, 석호정(石虎亭)과 우리나라 최초 실내 체육관인 장충체육관도 있다. 목멱산 자락 풍광 좋은 활터와 최고의 스포츠인 테니스 코트도 함께 있다. 리틀 야구대회도 장충동에서 하였다. 배구와 농구,탁구,레슬링도 장충체육관에서 전성기를 누비었다. 도성 안에 있었던 체육 시설물들이다. 새로운 현대 문화와 전통이 만나는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왜일까? 궁금해진다.

 

장충동은 장충단(奬忠壇)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장충단은 우리나라 최초의 국립 현충원이다. 도성 안에 정릉(貞陵) 이후 능과 묘를 쓸 수 없었다. 하지만 명성왕후가 시해된 을미왜란에 순국한 충신과 장병 그리고 열사들이 많았다. 고종황제는 1900년 남소영에 단을 설치하고 봄, 가을 제향을 하였다.

 

경운궁 앞에 환구단을 만들었듯이, 목멱산 자락에 장충단을 건립하였다. 이후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에 일본에 맞선 장병들을 위로하고, 나라 위해 목숨을 바친 분들에게 장충단의 규모를 넓혔다. 장충단비는 황태자인 순종이 직접 쓰고, 찬문은 충정공 민영환이 143자를 써 중요성을 높였다.


  장충단은 장충공원이 아니다. 사직단이 사직공원이 아니듯 목멱산은 남산이 아닌 이유와 같다. 격을 되찾아야 한다. 자신의 이름을 찾아 가치를 알려야 할 때이다. 장충단은 목멱산 자락 남소문터에서 국립극장, 반야트리호텔, 자유센터, 테니스코트, 신라호텔과 리틀야구장 그리고 장충단비와 수표교가 있는 곳까지 큰 규모의 국립 현충원 터였다. 장충단에 봄, 가을 군악이 연주되고 조총(弔銃)을 쏘아 제를 올렸던 신성한 공간이었다. 국가의 행사가 열렸던 엄숙한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역 총탄 3발이 울려 퍼졌다. 영웅이 태어나고 영웅이 죽었다. 이후 장충단이 급속히 변해 버렸다. 19번의 제사를 마지막으로 장충단은 이토 히로부미의 추모공간으로 바뀌었다. 장충단비는 땅 속에 묻히고, 장충단은 박문사로 이토 히로부미를 제사하는 사당이 되었다. 수천 그루의 벚꽃나무가 목멱산 순환도로에서 장충단까지 심어지고, 연못과 놀이터를 만들어 공원이 되어 버렸다.

 

해방 후 장충단은 제 모습을 찾아 되돌리고 있다. 장충단비(奬忠壇碑)가 길을 되찾아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호가 되었다. 목멱산 자락 안중근 의사 상(像)에서 장충단에 이준 열사 상까지 제 모습을 되찾고 있다. 장충단이 민족의 성지로 역사 공간으로 호국의 길, 사색의 공간이 되길 바란다. 이 길은 역사의 길이다. 어제와 달라진 오늘, 오늘보다 희망찬 내일을 기대하며 장충단 길을 걷는다.

  혹시 아는가? 이 길을 걷다가 나만의 인생길을 찾을지 말이다. 어떤 이는 길을 따라가고 어떤 이는 길을 만들기도 한다. 행여 당신이 갓길을 달리고 있다면 이젠 주저하지 말고 주행선 안으로 당당하게 들어가 보자. 그리고 갈 길을 찾았다면 바로 가던 길을 바꿔보자. 길은 만드는 자의 것이다. 인생길은 <방황>이 아니라 <방향>이다.

   <최철호/ 남예종예술실용전문학교 초빙교수, 성곽길 역사문화연구소 소장>

 

 

ⓒ 한경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