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시, 한시로 만나다] 문을 열며...

“한국 현대시, 한시로 만나다”는 우리의 현대시를, 한시(漢詩)로 옮긴 한역시(漢譯詩)와 곁들여 감상해보는 코너이다. 이 코너를 들여다볼 독자들 가운데는 멀쩡하게 잘 있는 한글시를 왜 굳이 골치 아프게 한시로 옮겼느냐고 질문할 분들이 분명 많을 것이다. 편안함과 용이함을 극도로 추구하는 이 시대 사람들에게는 한글시를 한시로 옮기는 일 자체가 어떻게 보면 시곗바늘을 거꾸로 돌리는 어리석음으로 간주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영화인들은 좋은 소설을 보면 영화로 만들고 싶어지고, 만화가들은 만화로 그리고 싶어지지 않겠는가? 필자가 좋은 한글시를 보면 한시로 만들고 싶어지는 것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한글시를 일단 한시로 옮겨놓으면 또 다른 버전(Version)의 시를 접할 수 있게 되어 이해의 폭과 깊이를 더할 수 있을 것이다. 소설을 읽은 뒤에 이를 영화화한 영화를 보거나 만화화한 만화를 읽는 경우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재구성자의 시각으로 필터링(Filtering)된 것이기는 하겠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원전(原典)과 재구성물(再構成物)을 상호 비교해보며 감상하는 것 또한 재미가 쏠쏠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팝송(Pop song)으로 영어 공부를 하듯 현대시로 한시를 공부하는 일이 가능해질 듯하다. 100세 시대를 지향하는 이 시점에서 한시는 한문(漢文)과 더불어 노후 대비용(?) 공부로는 단연 으뜸이라고 할 수 있다. 서울대 총장을 역임한 고병익(高炳翊) 선생이 은퇴한 이후에 비로소 한시를 짓기 시작하였는데, 유족의 회고에 따르면 은퇴한 후 10 수년을 교수로 재직하고 있던 수 10년보다 훨씬 더 즐거워했다고 한다. 한시 공부를 하다 보면 재미를 느껴 언젠가는 한시를 짓게 되고, 한시를 지으면서 그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게 되지 않겠는가!


한시는 근체시(近體詩)는 말할 것도 없고 고체시(古體詩)라 하더라도 정형시(定型詩)에 가깝지만, 그 함축성으로 인하여 자유시에서 구현된 ‘자유’를 정형적인 틀 안에 들일 수 있을 정도로 탄력이 있다. 필자는 한시의 묘미는 이런 데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한시는 괴로움이면서 동시에 즐거움이다. 한시에 관한 이런저런 것들을 공부라고 생각하면 재미가 없고 숙제라고 생각하면 짜증이 나겠지만, 놀이라고 생각하면 다른 것과 비교하기 어려운 재미가 분명 그 안에 있다.


조선 시대 신위(申緯) 선생 등은 한글로 된 시조(時調)를 한시로 옮겼고, 김안서(金岸曙)나 양상경(梁相卿) 선생 같은 사람은 한시를 시조로 옮기기도 하였다. 필자는 이제 우리의 현대시를 한시로 옮겨 색다른 문학세계를 독자들에게 선보이고자 한다. 그러나 필자의 역량이 부족하여 원시(原詩)의 뜻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는 경우도 많을 것이고, 필자의 독서가 빈약하여 정말 멋진 시들을 만나지도 못하는 경우 또한 많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 부끄러움과 두려움이 앞서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지만, 그렇다고 하여 꼭 가보고 싶은 길을 포기하고 싶지도 않다. 그 어떤 길이든 누군가가 가지 않으면 절대 생기지 않는 법이기 때문이다.


모든 글이 그렇듯 평(評)은 오롯이 독자의 몫이라 생각한다. 글쓰기가 오로지 독자의 입맛에 맞추기 위한 몸부림이 되어서는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독자를 안중에 두지도 않는 독백이 되어서는 더더욱 곤란할 것이다. 어떤 글이든 독자의 눈높이에 맞추지 못한 것이라면 그 글쓰기는 실패라고 한, 어느 벗의 술자리 지론(持論)을 곰곰이 되새김질해보며 두려운 마음으로 한국 현대시를 한시로 만나는 코너의 문을 연다. 앞으로 가야할 길이 멀리라.


2019. 6. 26


강성위 한경닷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