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고등학교 동창 친구들과 북촌 봄밤을 거닐어 보잔 약속을 했다. 이름 하여 북촌야행. 북촌은 이름만 들어도 복잡한 서울 속 고즈넉한 섬처럼 느껴진다. 북촌은 조선시대 양반층 주거지다. 경복궁이 가까이 있고 풍광이 좋아 고관대작들의 대형 한옥이 몰려 있었다.

1920년대까지 한옥 지역이 큰 변화가 없었다. 1930년대에 일제에 의해 서울 행정구역이 확장되고 도시구조가 근대화되면서 적지 않은 변화를 가져왔다. 주택경영회사들이 북촌의 대형 필지와 임야를 매입해 중소 규모 한옥들을 밀도 있게 지었다.

1930년대 조그만 한옥단지로 주택개발

율곡로에 있는 외숙이 살았던 집을 가르키며 자신도 자주 놀러 왔었던 기억이 있다는 친구.

북촌은 당시 한옥 분양광고에서 볼 수 있듯 밀도와 익명성에 대한 도시주택으로서의 요구를 반영해 근대에 새로운 주거형태를 선보인 곳이다. 북촌 8경이 있을 정도로 골목마다 운치와 경치가 빼어나다. 봄밤에 사내 셋이 걷기엔 너무 과분한 미학을 가진 곳이란 생각이 들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야행 전 야식을 위해 안국역 북촌로 재동초등학교 앞 삼거리 가는 방향 입구에 있는 설렁탕집 전문점 <만수옥>을 찾았다. 간판에는 1969년 문을 열었다고 적어 놨다. 꽉 채운 오십 년, 야행객들과 얼추 비슷한 나이다. 설렁탕은 탕과 국으로 대표할 수 있는 서울 토박이 음식 중 대표선수 격이다.

<만수옥> 메뉴판. 한우를 사용하고 있다.

<만수옥> 도가니수육

<만수옥> 도가니 수육은 자박한 국물가 함께 데워 먹을 수 있게끔 화기를 같이 내온다.

조선말부터 일제 강점기 사이 서울 전역에 전파돼 인기 있는 ‘서울음식’으로 자리하고 있다. 고 강인희 교수가 쓴 ‘한국인의 보양식’에 따르면 일반적인 설렁탕 제법은 쇠머리, 쇠족, 도가니. 사골, 우설, 양지머리, 사태, 지라, 유통 등을 통파, 마늘, 생강을 넣고 푹 끓인다. 고기가 적당히 무르면 수육으로 썬다. 간을 미리 맞추지 않으며 소금, 굵은 고축가루, 후춧가루, 썬 파는 따로 곁들인다.

대표적 서울음식인 설렁탕 맛집

<만수옥> 도가니수육은 식감이 무르지도 억세지도 않은 것이 특징이다.

서울시 사사편찬위원회의 ‘서울의 근현대 음식’에 따르면 서울에서 유행한 음식은 일제강점기엔 설렁탕, 추탕, 떡국, 가리구이 해방 이후에는 빈대떡을 손꼽았다. 설넝설넝해서 설렁탕이란 추론도 있고 선농단 제사 후 많은 사람을 먹이기 위해 탕을 끓여 먹은 데서 유래한다고도 한다.

국물이 진하기로 유면한 <만수옥> 설렁탕. 50년 역사를 지닌 음식이다.

선주후탕(先酒後湯)이란 미명하에 <만수옥> 도가니 수육에 술을 한잔씩 했다. 술을 잘 못하는 한 친구는 소주잔에 맥주를 받아 들고 장단을 맞췄다. 도가니 수육은 독립문 <대성집>(미쉐린가이드 빕구르망)과 달리 화기 지원을 한다. 장충동 <별내옥설렁탕>은 뜨겁게 데운 곱돌에 담아 내 온기가 제법 오래간다. <대성집>은 국물이 없기 때문에 화기가 없어도 된다. <만수옥>과 <별내옥설렁탕>은 자작한 국물과 함께 나오기 때문에 데워야 굳지 않는다.

'선주후탕', 도가니 수육에 소주 한잔 후 설렁탕 마무리 

<만수옥>은 속 깊은 전골냄비를 휴대용 가스버너 위에 올려서 내온다. 따끈하게 살살 데워 먹을 수 있어 좋다. 그러나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고 무쇠 전골냄비보다 웅숭깊은 도기 전골 그릇을 사용하면 좋겠단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대도식당> 무쇠 불판도 지금의 전골냄비보단 정취 있어 보일 거란 생각이다. 업력이 전골냄비와 비례할 필요는 없다. 지나가는 식객의 아쉬운 심사일 뿐이다.

선주후탕 마무리를 위해 설렁탕을 시켰다. 뽀얗다 못해 약간의 노리끼리한 색을 띤 걸쭉한 탕이 설설 끓으면서 나왔다. 육수 진하기로는 사대문 안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다. 아무런 가미 없이 숟가락에 육수를 담아 입안으로 공수했다. 처음부터 뒷맛까지 조미료 풍미가 전혀 느껴지지 않은 쫀득한 맛이 일품이다. 100년 전통의 <이문설렁탕>이 담백, 깔끔, 라이트라면 <만수옥>은 묵직, 농후, 헤비한 맛이다. 이들 중간쯤 설렁탕집을 세운다면 <마포양지설렁탕> 정도다.

벽 한쪽에 ‘진성만능’이란 편액이 걸려 있다. 정성을 다하면 모두 이뤄진다 정도로 해석된다. 자연스레 이 집 슬로건 됐다. <만수옥>은 대중음식인 설렁탕을 보약처럼 만들어 수(壽)를 늘려주고 싶다는 주인의 바람을 담았다. 현대 계동빌딩 옆이라 고 정주영‧몽헌 회장, 이명박 전 대통령도 단골이었다고 한다.

 

북촌골목에 인적이 뜸하다. 회식문화가 바뀐 후 가속화되고 있다고 한다.

배를 얼추 채우고 북촌 한옥마을로 가는 길에 헌법재판소를 가장 먼저 만났다. 백송을 보기 위해 들어가려 했지만 야간에는 출입이 어렵다고 해서 멀찌감치 밖에서 구경했다. 멀리서도 위용을 볼 수 있을 정도로 헌재 백송은 크고 늠름했다. 골목으로 들어서자 윤보선 가옥, 안동교회, 명문당 출판사가 한데 모여 있다.

북촌팔경 중 하나인 북촌6경인 가회동 오름길.

윤보선 가옥은 윤 전 대통령이 거주했던 집으로 1870년 대 당시 민가 최대 규모인 99칸 저택으로 지어졌다. 집주인은 최초 민대감이 지었고 고종이 매입 박영효에게 하사, 윤치소(윤 전 대통령 부친) 매입으로 이어졌고 지금은 윤 씨 일가가 계속 살고 있다. 윤보선 가옥 건너편 명문당 꼭대기 층은 박정희 정권이 윤 전 대통령을 감시하기 위해 증축했다는 설도 있다.

종로 갈매기살 골목은 그런대로 선방을 하고 있었지만 여기도 예전같지 않다. 그 많던 식객들은 다들 어디론 간 것일까. 워라밸, 소확행이 바꾼 문화들.

이날 야행은 친구의 외숙이 살았다는 율곡로의 한옥집(현재 플로라), 북촌 한옥마을을 차례로 돌았다. 다소 놀란 것은 골목 내 한옥 카페와 식당, 심지어 북촌 골목에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북촌 일대가 초저녁부터 완전히 시골 동네처럼 인적이 없었다. 덕분에 조용한 야행을 선물 받았지만 실물경제 현장인 듯 씁쓸했다.

사내 셋, 북촌야행은 종묘 앞 종로맛골목에서 끝을 맺었다.

최근 만나는 외식업 대표들 이구동성이 ‘매출하락’이다. 올랐으면 올랐다고 할 사람조차 혀를 내두르고 고전을 면치 못한다고 울상이다. 북촌을 거쳐 종로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낙원지하시장도 썰렁하고 아귀찜 상권도 죽었다. 그나마 익선동과 갈매기살 골목 정도가 선방하고 있었다. 멸치 육수 베이스로 유명한 <종로할머니칼국수> 집은 일찌감치 문을 닫았다.

그 많던 고객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요즘 회식 문화보다는 워라밸, 소확행 등 트렌드가 정착되면서 불금 문화가 사라지고 있다는 친구의 해석이 설득력 있게 들렸다. 그동안 역사문화 다사를 다니면서 해설사들에게 들었던 서울의 역사가 조각보 같이 떠올랐다. 그것을 다시 친구들에게 들려주자 많이들 좋아했다. 봄밤, 사내 셋, 딱 좋은 규모의 북촌야행 팀이었다.

유성호 한경닷컴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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