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집에서 얼마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복합공간이 마음에 들어서 자주 이용하고 있다. 음식이나 커피를 사지 않고 몇 시간이든 그 공간에 있어도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는 데다가 차로 이동하는 나로서는 주차료가 무료인 것이 가장 큰 혜택이다. 독서용 스탠드를 설치해 둔 책상들도 있고, 많은 가족이나 혼 밥을 하는 사람들도 한끼를 편하게 먹을 수 있도록 여러 가지 형태의 테이블이 자연스럽게 배치되어 있다. 편의 시설로는 1층 복합공간에 함께 있는 식당들과 지하에 두 개 층으로 나누어져 있는 마켓과 8개 층의 지상 주차장이 전부다. 심지어 이곳 마켓에서 판매되는 식품 가격은 코스트코 가격대비 최저가 정책을 시행하고 있어서 오전에 가면 신선한 제품을 저렴한 가격으로 살 수 있다. 대기업이 왜 이런 서비스를 제공하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마음에 드는 공간이다.

다른 곳에 비해 이 지역은 집값이 저렴한 편이어서 신혼 부부들이나 혼자 사는 젊은 사람들이 많이 사는 지역이다. 그러다 보니 이 공간은 주로 가족 단위의 젊은 부부들이 많이 이용한다. 평일에는 더구나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 보니 낮에는 애기 엄마들이 삼삼오오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미세먼지와 아파트의 층간 소음 스트레스 없이 마음껏 뛰어 놀게 한다. 나도 미팅이 있으면 주로 이곳을 이용하고 미세먼지가 심한 날에는 좁고 답답한 실내 보다는 넓고 쾌적한 이곳을 주로 찾는다. 이곳에 있으면 우리나라가 저 출산 국가가 맞나 싶을 만큼 취학 전 아이들이 많다. 다소 버거운 층계를 네발로 기어 올라가는 모습이나, 그 짧은 한 발로 층계를 내려가다가는 영락없이 굴러 떨어질 것이 뻔한 일인데도 그런 위험을 전혀 모르고 발을 쭉 뻗어 위험 천만함을 감행하는 아이의 모습은 행복한 미소를 띄지 않을 수 없는 광경들이다.

에너지를 주체할 수 없어서 제법 너른 공간을 뛰고 또 뛰고, 계단을 수도 없이 오르내리는 아이 때문에 양복을 입은 아빠는 피곤함이 역력함에도 불구하고 연신 졸졸 따라다니며 싫은 내색을 감추는 모습은 한편으로는 짠해 보이기도 한다. 직장에서 가정에서 그들의 노고는 쉼을 잃은 듯 해 보였다. 최근에 발표된 통계를 보니 남자보다 여자의 가사노동 시간이 더 많다는 보도도 있었지만, 아무튼 피차 그렇게 힘들게 살고 있는 모습을 보니 내 젊은 시절이 생각나는 순간들이었다. 그때는 남편의 도움 없이 여자 혼자 삼 남매를 키우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는데 지금의 아빠들의 상황이 좀 달라진 것도 사실이다. 개인의 상황이야 어찌되었건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의 서두는 대략 이러하다.

중요한 것은 내가 그때는 왜 그랬느냐? 하는 것이다. 아이가 친구들과 놀다가 다투면 싸우지 말고 사이 좋게 지내라고 가르쳤다. 한 아이가 넘어지면 친구를 일으켜 주라고 가르쳤다.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는 조용히 말하고 뛰면 안 된다고 가르쳤다. 식사시간에는 움직이지 말고 흘리지 말고 잘 먹으라고 가르쳤다. 사람들이 많을 때는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세대를 넘어 지금의 부모들도 아이들에게 이렇게 가르친다. 부모들은 왜 이렇게 가르치는 걸까? 지금의 부모는 자신의 부모에게 혹은 교육을 통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배웠고 배운 대로 하는 것이리라. 옳은 일. 당연한 일. 그래서 부모는 지금도 그렇게 가르친다. 자신 있게.

내 아이들이 성장하여 어느덧 서른 즈음 나이들이 되고 보니 이제는 자주 나를 가르친다. 쓰레기 봉투에는 정량만 넣어라. 운전하면서 화내지 말아라. 뷔페 식당에서 음식을 적당히 조금씩 가져다 먹어라. 등등… 갈수록 잔소리가 늘어난다. 애들 눈치를 보느라 나도 모르게 행동을 살피는 내 모습을 보면서 내가 그때 왜 그랬나 싶다. 친구들과 싸울 일이 생기면 싸워라. 아이가 넘어져도 일으켜 주기 싫으면 그냥 지나쳐라. 사람들이 많은 곳이어도 큰소리로 말하고 싶으면 해라. 바쁘면 줄을 서서 기다리지 말고 앞서 가라고 가르칠걸 그랬나 싶다. 세상이 바뀌었다. 질서도, 양심도, 교양도, 배려도 변질되고 퇴색되었다. 옳은 것을 옳다고 말하면 꼰대가 되고, 잘 못된 것을 지적하면 잔소리꾼이 된다. 상대에게 배려를 요구하면 주책 맞은 사람이 되고, 양심을 거론하면 비아냥의 대상이 된다. 혼돈이다. 너, 나 할 것 없이 우리는 혼돈 속에 살고 있다.

아이들이 청소년기에 자주 한 질문 중에 하나는 “이럴 때 나는 어떻게 해요?” 라는 질문들이었다.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혼돈 속에서도 우리는 나의 위치를 정해야 한다. 어디에 설 것인가?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선택해야 한다. 얼마 전에 일부 청년들의 정체성을 확인할 계기가 있었다. 그들에게 윗사람은 없었다. 그들에게 선생은 그저 ‘정보를 제공하는 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들은 그저 배울 것이 있으면 배우고 아니면 말고, 그 외 다른 것들로 불필요(?)한 신경을 쓰고 싶지 않다는 반응들이었다. 돈을 주고 정보를 사고 팔고, 누군가가 배려하는 마음으로 노고를 감수하고 정보를 무료로 제공하면 ‘자기가 주고 싶어 준거잖아? 누가 달래?’ 라는 식, 더 나아간 생각은 하고 싶지 않고, 타인의 불편한 행동에 대해서도 자기 하나만 눈 감으면 되는 일이고, 그저 자신의 생각에 매몰되어 그것이 어디를 향해 가는지, 무엇을 향해 가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무척 바빠 보이는 것 같지만 실상은 아무것도 없는 허상에 있는 것 같은 그들을 보았다. 어쩌면 이들의 모습이 불투명한 우리 미래의 모습인 것 같아 마음이 찹찹했다.

물론 목표를 향해 질주하는 청년들도 있다. 하루가 이틀인 듯 성실히 최선을 다해 사는 청년들도 있다. 눈 앞에 놓여진 현실을 살아 내느라 숨이 턱에까지 차지만 주변을 살필 겨를 없이, 잠은 생존을 위한 행위 정도로 마치 의식을 행사하듯 그렇게 하루 하루를 정신 없이 사는 청년들도 있다. 그런데 그들도 사는 이유를 모르기는 매 한가지다. 무엇을 향해? 무엇을 위해 미친 듯이 질주하는 가 하는 문제에서는 말을 선뜻 꺼내지 못한다. 아이를 기르는 일이나 자신이 사는 일이나 이런 모든 일련의 일들에서도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람’이다. 사람은 근본적으로 인격체이다. 인격체이라는 것은 사람으로서의 품격이 있는 개체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 사람이 그 품격을 잃으면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 된다. 그러므로 사람이 사람 되려면 품위와 격식을 갖춰야 한다. 품위와 격식이 충족되려면 교양, 양심, 질서, 배려, 존중과 같은 요소들을 필요하다. 이것은 자신이 타인으로부터 받아야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자신이 노력하고 애써서 갖추어야 하는 것들이기도 하다. 피차가 스스로 자신을 ‘사람다움’으로 만들기 위해 애쓰고 노력한다면 우선은 내가 행복한 사람이 될 것이고, 또 우리가 서로에게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로 볼 때 현대는 사람 아닌 동물들이 너무 많은 것 같다. 사람의 탈은 썼는데 사람이 아니고 자신은 사람이라고 말하는데 흉악한 괴물인 경우가 너무 많다. 부모가 아이를 가르칠 때처럼 우리도 그렇게 아이가 되어 다시 배워야 한다. 줄은 서는 것이 맞고, 누군가 넘어지면 일으켜 주는 것이 맞고, 공공장소에서는 조용히 말하는 것이 맞고, 화를 내기보다는 양보하는 것이 맞고, 음식은 적당히 먹을 만큼 가져 오는 것이 맞고, 쓰레기는 정량대로 버리는 것이 맞다. 윗사람은 아래 사람을 자애로움으로 보살피고, 아래 사람은 윗사람을 존중하고 배려해 주는 것이 맞다. 어른은 섬기는 것이 맞고, 강자는 약자를 보호하는 것이 맞다. 대기업은 중소기업을 배려하고 함께 상생하는 것이 맞고, 사업주는 고용인을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며 채용하는 것이 맞다. 나도 자꾸만 나도 모르게 짐승이 되어가는 것 같아 두렵다. 천진난만하게 뛰어 노는 아이들을 보면서 반성한다. 우리도 다시 자신의 모습을 살피고 가다듬어 아이처럼 처음부터 다시 해 보는 건 어떨까? 시작이 반이라고 했듯이 지금부터 시작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분명. 그렇게 우리도 사람들이 사는 세상을 만들자. 우리는 사람이니까.

 

오미경 한경닷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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