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수칼럼] "아버지, 못 해 드린 것만 생각나요!"
실제 미국에서 있었던 일이다.

“아버지를 팝니다. 만 달러에 아버지를 사 갈 사람은 전화해 주시기 바랍니다.”

신문 광고란에 ‘중풍과 치매로 병석에 누워 계시는 아버지를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어서 판다’는 것이다. 광고를 보고 한 젊은 남자가 전화를 해 왔고 광고 낸 사람은 환자를 돌보는 일은 쉽지 않으니 일주일 더 생각해보길 권유했다. 일주일이 되는 날 젊은 남자는 다시 전화를 해왔다.

“당신의 아버지를 사서 모시기로 부부가 합의했습니다.”

“특별한 이유와 조건이 있나요?”

“저희 부부는 고아원에서 부모 얼굴을 모르고 자랐어요. 지금은 결혼해서 자녀를 낳고 나름 행복한 가정을 살고 있는데 ‘아버지’, ‘어머니’라고 부르며 모시고 살 수 있는 분이 계시면 좋겠습니다. 아이들도 좋아하고 넉넉한 형편은 아니지만, 당신의 아버지를 친아버지처럼 모시면서 효도하고 싶은 생각뿐입니다.”

거래는 성사되었다. 젊은 남자는 부푼 마음으로 아버지를 모시기 위해 만 달러를 가지고 주소지로 찾아갔다. 그런데 도착해보니 미국에서도 부자들만 모여 사는 타운이었던 것이다. 하인들도 있고 수영장이 있는 호텔처럼 잘 꾸며진 집이었다. ‘이런 부자가 왜 자기 아버지를 판다는 것일까’ 젊은 남자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광고를 낸 사람입니다. 내가 나이가 많고 자식이 없기에 자식이 될 만한 착한 사람을 구하려고 거짓 광고를 냈습니다.”

“네? 뭐라고요?”

“이제 너는 내게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되었다. 이 집을 비롯한 모든 재산을 너에게 주겠다.”

필자에게 희한한(?) 습관이 있다. 습관인지 잘 모르겠지만 같은 행동을 반복하다보니 그렇다고 믿는다. 이 습관은 음식점에서 필자가 먹은 음식을 다시 포장 주문하는 것이다. 외식을 거의 하지 않는 편인데 모임이나 외식을 하는 특별한 경우가 있으면 매번 그렇게 음식을 싸온다. 만약 음식이 입맛에 맞지 않으면 하다못해 계산대 앞에 있는 두부과자, 센베이 또는 뻥튀기라도 꼭 사온다.

이 습관은 함께 사는 시아버지 때문에 생겼다. 시아버지는 삼십년 전 중풍으로 반신불수가 되셨다. 그렇다보니 바깥출입이 자유롭지 못했다. 그래도 시아버지는 불편한 몸을 이끌고 동네 산책하기를 무척 좋아했는데 언제부턴가 외출을 힘겨워했다. 그 때부터 시아버지는 창을 통해 바깥세상을 보았고 어쩌다 아는 이웃이 지나가면 창문을 세게 두들겨 손을 흔들곤 했다. 마치 그 모습은 이웃에게 ‘아직 내가 살아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아부지, 저 다녀왔어요!”

“아부지, 이것 좀 맛보세요!”

“아부지, 이거 저 혼자 먹은 게 미안해서 사왔어요!”

필자는 사실 효부는 아니다. 시아버지 이야기라서 시댁 식구가 이 글을 읽을까봐 좋은 글만 쓰고 싶다. 하지만 필자는 며느리다. 며느리로서 시어머니도 아닌 시아버지와 함께 살며 겪었던 고충을 다 쓰자면 글을 마무리 못해 ‘시아버지 험담(?)시리즈’가 나올 것 같아서 무섭다. 더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한 공간에서 함께 산소를 나누는 것조차 힘든, 그야말로 호흡이 힘든 날’도 많았다.

‘아버지 효과’란 게 있다. 어머니보다 아버지가 더 자녀의 심리적 성장, 가치관 등에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심지어 언어, 사회성 그리고 정서와 습관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한마디로 아버지의 태도가 자녀에게 그대로 학습되어 각인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필자는 함께 사는 ‘시아버지 효과’도 영향을 주는지 궁금한 생각이 든다. “며느리도 자식이니까.”

“어딜 그렇게 쏘다니다 와?”

“때가 되면 집에 기어들어와야지!”

“나는 산(살아있는) 사람도 아녀!”

시아버지가 우리 가족에게 늘 하는 말이다. 직장을 다니든, 강의를 하고 오든 말든 시아버지는 상관없이 큰 소리로 말했다. 정말 힘들었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필자가 일을 잠시 쉬며 하루 종일 시아버지와 함께 지내다보니 이 말들이 이해가 되었다. 그리고 필자 귀에 이렇게 들렸다.

“나 혼자 집에 있는 거 알지?”

“너희들은 나가서 돌아다녀 좋겠다. 난 외롭다!’

“내가 아직 살아있다. 나를 좀 더 보아 달라!”고.

범죄학 용어에 ‘로카르의 교환 법칙’이 있다. 접촉하는 두 물체는 반드시 서로에게 흔적을 남긴다는 법칙이다. 이는 같은 공간에서 숨을 쉬는 것만으로 누군가에게 영향을 미치며 직접 접촉하지 않더라도 어떤 식으로든 마음속에 흔적을 남긴다고 한다.

필자에게 시아버지가 그렇다. 몸 반쪽이 불편하신 시아버지의 반쯤 감긴 눈, 그 눈에 붙은 눈곱을 물수건으로 닦아내던 일. “나는 네가 만든 음식은 다 맛있어!” 맛있게 드시며 웃으시던 기억 등 시아버지가 필자 마음에 많은 흔적을 남기고 떠나셨다. 그렇게 시아버지와 필자는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었다.

설 명절이 코앞이다. 그리고 오늘이 시아버지 기일이다. 그런데 지금에야 고백한다. 필자가 사온 비닐봉지 속 음식과 과자들은 ‘아버지를 위해서!’처럼 보였지만 시아버지가 안 계신 지금 ‘내 마음 편하기 위해서!’ 했다는 것. 그걸 이제야 깨달았다. 시부모든 친부모든 부모는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것을.

“아부지! 아부지가 안계시니 못 해 드린 것만 생각나네요… 미안하고 사랑합니다!”

Ⓒ이지수20190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