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꽃다운 나이 타오르는 불꽃처럼 인왕산 자락 서대문 감옥에서 순국하신 유관순 열사의 마지막 말씀이다. 100년 전 천안 헌병대에서 공주 감옥으로 다시 서대문 감옥으로 이감되어, 운명 같은 길을 간다. 1914년 공주 영명학교에서 샤프 선교사(A.J. Hammond Sharp, 사애리시)를 만난다. 교육 목표가 신앙인으로, 나라와 겨레를 위하여 몸 바치는 애국정신을 심어준 학교이며, 어둠을 밝히는 영원한 빛이 되라는 의미의 영명(永明)학당이다.

 



공주 제민천을 거슬러 길을 걷는다. 공산성을 등지고 산성시장을 바라본다. 1919년 4월 1일 공주만세운동의 집결지다. 그날의 함성이 들리는 듯하다. 왼편에 보이는 언덕이 영명동산이다. 영명학교 가기 전 유관순 열사의 상(象)이 있다. 어리지만 당당한 모습이다. 의연함이 엿보인다. 영명학교 100주년 기념탑에도 유관순 열사를 볼 수 있다. 유관순 열사의 순례길이다. 사애리시 교장이 천안 아우내까지 가 장학생으로 발탁했다. 학생을 너머 양녀로 삼아 영명학당에서 이화학당까지 편입시켰다. 고종황제가 교명과 현판을 하사한 이화(梨花)학당이다.

 



그녀는 천안 아우내[竝川]에서 5남매 중 둘째 딸이었다.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운동이 활화산처럼 번지자 중등학교 이상은 휴교령이 내린다. 고향으로 내려온 유관순 열사와 사촌 언니 유예도는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만든다. 4월 1일 봉화를 신호로 들불처럼 만세운동이 일어난다. 계몽운동가였던 아버지 유중권이 일본 헌병에 스러지고, 어머니 이소제도 일제의 총칼에 돌아가신다. 처참한 광경이다. 숙부 유중무와 오빠 유우석도 시위에 참여한다. 영명학당 학생 유우석은 석방 후 임시정부에서 활동을 한다. 유관순 열사 개인이 아니라 가족 모두 3.1운동을 주도한다. 가슴 아픈 가정사가 새로운 역사로 꽃 피었다.

 



인왕산 자락 경성 감옥이 서대문 감옥으로 되면서 사람이 넘쳐난다. 독립운동과 만세운동을 한 투사들로 가득 찬다. 공주 감옥에서 서대문 감옥으로 이감된 후에도 유관순 열사는 아침, 저녁으로 독립만세를 외친다. 특히 1920년 3월 1일 만세운동 1주년에 옥중 만세운동을 주도한다. 그리하여 지하 감방에서 무자비한 고문으로 방광이 파열되며 처참한 죽음을 맞는다. 1920년 9월 28일 석방을 얼마 남기지 않은 상태에서다. 그의 용기는 어디에서 왔을까?

  정동제일교회에서 염을 하고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한다. 그러나 일제는 군용지로 사용하기 위해 미아리 공동묘지로 강제 이장 후 무연고 묘가 되어 망실된다. 비통하다. 용산 이태원 역사공원에 추모비를 세운다. 천안 병천에 영혼을 위로하는 초혼묘만 있다. 역사는 흐르고 3.1운동 100주년이 되었지만 유관순 열사의 묘(墓)는 없다. 찾을 수가 없다.

  겨레의 꽃 유관순 열사의 묘역이 필요한 시점이다. 유관순 열사의 추모비가 아니라 묘역에서 참배를 올리고 싶다. 3.1운동 100주년을 기념 해 1월의 독립운동가를 만나고 싶다. 꽃다운 18살 나이의 의연하고 당당한 청춘을 배우고 싶다. 지나 온 100년을 기리고, 다가 올 100년을 준비하는 모멘텀을 찾아 길을 걷는다. 길에는 걸어온 길이 있고 걸어갈 길이 있다. 그 길은 지난 100년처럼 울퉁불퉁 구불구불 할 것이다. 설령 직선이 아니라 곡선일지라도 그 길을 걸으면서 다시 100년을 준비해본다. 오늘도 길에서 배우고, 비우고, 채운다.

 

길은 그래서 좋다.

<최철호/ 남예종예술실용전문학교 초빙교수, 성곽길 역사문화연구소 소장>

 

ⓒ 한경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