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마귀 이야기
까마귀 이야기
까마귀에는 까마귀 떼까마귀 갈가마귀 등 여러 종이 있다.
까치나 까마귀에 대한 인식은 중국이나 한국이나 거의 같다.
보통 까치는 길조, 까마귀는 흉조라고 인식한다.
까마귀는 음침한 울음소리와 검은 색깔로 멀리 하는 새이며,
좋지 않은 의미로 많이 사용된다.
또한 까마귀는 시체를 먹는 불결한 속성이 있어 까마귀 밥이 되었다고 하면 곧 죽음을 의미한다.
이렇듯 까마귀는 불길의 대명사로 인식하고 있지만
인간이 반드시 본받아야 할, 간과할 수 없는 습성도 있다.

옛날 어미 까마귀와 새끼 까마귀가 있었는데,
어미가 새끼 까마귀에게 먹이를 물어다주며 정성스럽게 돌봐
새끼 까마귀는 무럭무럭 잘 자랐다.
어느덧 어미 까마귀가 늙어서 혼자 먹이를 찾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자 다 자란 새끼 새가 어미를 돌보았다”는 옛 이야기에서
까마귀의 효심을 상징하는 “반포지효”란 말이 나왔다
. 反(돌이킬 반)哺(먹일 포)之(어조사 지)孝(효도 효)
이 새끼 까마귀처럼 자식이 자라서 어버이를 봉양하며 길러준 은혜에 보답하는 것을
우리 토박이말로는 ‘안갚음’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 말을 쓸 때는 발음이나 표기에 주의해야 한다.
자칫 ‘앙갚음’이라 했다가는 전혀 다른 말이 되고 만다.
‘앙갚음’은 자기에게 해를 입힌 사람에게 보복하는 행동을 뜻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또 오합지졸이라는 말도 있다.
烏合之卒 까마귀가 모인 것 같은 무리라는 뜻으로, 질서(秩序) 없이
어중이떠중이가 모인 군중을 뜻한다.
또는 제각기 보잘 것 없는 수많은 사람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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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마귀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앉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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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날아오는 까마귀들도 일정한 그 간격을 지키면서 새 자리를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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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두마리가 앉으면 줄이 덜 흔들리는데 어쩌다가 서너마리가 동시에 앉으면 줄이 몹시 흔들리고 그럴 때마다 까마귀들이 일제히 날아 장관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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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이란 줄에는 온통 까마귀 천지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앉는 줄에만 앉는다. 옆줄은 텅텅 비어도 안 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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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모를 일이다. 고압철탑 네 줄과 그 아래 전선 네 줄에만 까마귀가 앉는다. 왜 그럴까 까마귀만 아는 일이다. 미안하지만 나는 모른다.
까마귀 이야기

한시간 정도 꾸역꾸역 모여들던 까마귀는 수십마리씩 남쪽으로 날아가더니 어느새 전기줄이 텅 비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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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깜해지자 까마귀들은 모두 약속이나 한 듯이 다 어디론가 날아가버렷다. 나는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 아마 자기들만의 숙소로 잠자러 갔을 것이다


영국 리즈大의 데이비드 밀러 박사는 중생대 2억년 동안 지구상에서 무적의 제왕으로
군림했던 공룡이 멸종한 원인을 ‘성비(性比)의 불균형’에서 찾는다.
수컷과 암컷의 비율이 깨져 짝짓기를 제대로 못해 공룡이 멸종했다는 주장이다.
그렇다면 인간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그만큼 생존에 있어서 짝짓기는 필수적이다.
제프리 밀러가 쓴 <메이팅 마인드 Mating Mind>라는 두툼한 책은
“인류 역사는 곧 짝짓기의 역사다” 라는 말로 압축할 수 있다.

우리의 유전자는 매 세대마다 생존 그 자체를 위해 ‘짝짓기’라고 불리는 관문을 통과해야 했다.
제 아무리 뛰어난 자라 할지라도 짝을 얻어 자식을 낳지 못했다면 결코 우리의 조상이 될 수 없었다.
결국 인류의 진화는 성공적인 짝짓기에 의해 이루어져 온 것이다.
정녕 위대한 짝짓기가 아닐 수 없다.
독일의 비교행동학자 칼 그람머는 남녀의
만남을 집중적으로 관찰해서 분석한 결과,
남녀는 서로를 향해 첫 만남 5초 안에 상대방의 잠재적 번식력 내지 생식력을 판단한다고 주장했다.
첫 만남 5초 안에 상대의 생식력을 판단하는 인간이라~.
어쩌면 이런 초능력에 가까운 짝고르기와 짝짓기의 능력 덕택에
인류는 지금껏 자신의 종을 유지해왔는지 모른다.
하지만 정작 짝고르기와 짝짓기가 그리 쉬운 것이 아니다.
시장기같은 외로움을 느끼다가 그 외로움을 떨치려고 짝고르기와 짝짓기에 나서 보지만
실제 그 ‘작업’이 간단치 않다. 아니 엄두 자체가 나질 않는다.
정작 맘에 드는 사람이 포착된다 해도 접근부터가 쉽지 않다.
다름아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 때문이다.
미국의 인류학자 에드워드 홀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를 통해 친밀감의 척도를 이야기했다.
이를테면 45.7cm미만은 ‘친밀한 거리’, 45.7~120cm는 ‘개인적 거리’, 120~370cm는 ‘사회적 거리’,
그리고 370cm를 초과하면 ‘공적인 거리’라는 것이다.

‘친밀한 거리’ 안에서는 냄새만으로도 상대를 알아본다고 한다.
‘내 남자의 냄새…’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만큼 밀접한 사이의 사람들이 연출해 내는 거리다.
친밀한 거리보다는 다소 멀지만 여전히 가까운 사람 사이의 거리가 ‘개인적 거리’다.
만약 배우자가 아닌 이성이 개인적 거리 안에 들어와 있으면
남의 눈에는 때로 부적절한 관계로 보일 수도 있다.
두 사람이 부부인지, 아닌지는 아무리 감추고 위장하려고 해도 드러나기 마련이다.
개인적 거리 안에서 자연스럽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사회적 거리’는 오래된 부부가 서로 멀찌감치 떨어져서 걷는 모습을 연상하면 될 것이다.
물론 요즘엔 노부부들조차 멀찌감치 떨어져 걷지 않는다.
최소한 개인적 거리 안으로는 들어와 있는 추세 아닐까?
한편 ‘공적인 거리’에서 사람들은 단어 선택이 신중해지고 형식적 말투로 일관하게 된다고 한다.
한마디로 ‘거리를 둔다’는 말이다.
결국 시장기같은 외로움을 떨치고 짝고르기와 짝짓기가 가능하려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부터 줄여야 한다.
짝짓기는 바로 그 거리를 뛰어넘는 일이다. 그것도 과감하게 말이다.
글_정진홍/ 중앙일보 논설위원,



사람들에게 까치와 까마귀에 대한 친밀도를 물었다.
당연히 까치를 좋아했고 까마귀는 심지어 무섭다고까지 했다.
그 이유는 거의 습관적인 교육의 탓이다.
까치가 깃털에 흰색이 섞였고 까마귀가 온통 검다는 외관적인 면 때문이 아니다.
어릴 때부터 까치와 까마귀는 흔했다.
언제 어디서나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새를 놓고 우리의 인심은 달랐다.
까치는 반가운 소식을 전해주는 길조고
까마귀는 흉한 소식을 전해주는 흉조라고 배웠다.
사실 요즘은 조류세상에서 까치만큼 무서운 새도 없어진다.
집단으로 조직적으로 행동하면서 천하무적으로 변해서 난폭자가 된 것이 까치이다.
대신 까마귀는 점점 없어져서 까마귀를 볼 수 없는 지역이 늘어나고 있다.

까마귀 사진을 올리고 까마귀 이야기를 했지만 사실은 다른 이야기를 하려고 한 것이다.
사회학적으로 ‘사람사이의 거리’는 친밀도의 기준이다.
미국 인류학자 에드워드 홀은 인간관계의 거리를
친밀한 거리(45.7cm 미만),
개인적 거리(45.7~1.2m),
사회적 거리(1.2~3.7m),
공적인 거리(3.7m 초과)
등 4가지 유형으로 분류하고 각각의 범주 안에서 가까운 거리와 먼 거리의 차이를 구분했다.
이렇게 ‘친밀도이상의 거리를 침범’하게 되면 불편감과..심하면 불쾌감을 유발할 수도 있습니다.
거리 분류에서 결정적 요인은 ‘그 순간 사람들이 서로에 대해 어떻게 느끼느냐’이다.
어떤 두 사람이 얼마나 떨어져 있느냐는 두 사람이 무슨 관계인가를 은연중 드러낸다.

사진을 잘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까마귀들이 한결같이 일정한 거리를 두고 앉아 있다.
중간에 거리가 먼 까마귀 사이에는 어김없이 다른 까마귀가 앉았다.
그 거리를 유심히 관찰해 보니 부리로 옆의 새를 쪼아서 해를 끼칠 수 있는 거리를 막 벗어난 거리였다.
까마귀에 있어서 개인적거리는 부리로 쪼을 수 있는 거리였다.
친밀한 거리가 45.7 센치미터라는데 그 수치는 어디서 나왔을까?
며칠을 생각한 결과는 이렇다.
45.7센치미터는 상대를 쳐다보았을 때 눈의 초점이 무너지지 않을 거리라는 것이다.
그보다 가까운 거리에서는 눈의 초점이 무너진다.
즉 상대를 가장 가깝게 바라볼 수 있는 거리가 45.7 센치미터이다.
또한 45.7센치미터는 상대방의 체취나 화장품 향기를 맡을 수 있는 거리이다.
45.7센치미터는 상대와 어깨동무를 하거나 포옹을 할 수 있는 거리이다.
이 길이는 손목에서부터 겨드랑이까지의 평균길이 같다.

거리이야기는 그만 하고
정작으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애인의 거리이다.
애인과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몸이 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사랑의 법칙이 있지만
그 법칙은 일정한 시간 아예 만나지 않는 경우를 말하는 것이다.
그보다 더 근본적으로 <마음이 멀면 몸이 멀어진다> 라는 가설을 주장하고 싶다.

경험적으로 보아서 자주 만나면 싫던 사람도 정이 든다.
사랑하던 사람도 연락없이 이유없이 몇 달을 피하면 남처럼 서먹서먹해진다.
그러나 그런 외적인 만남 이전에 어떤 사람이 싫어지면
무슨 타당한 이유를 억지로 만들어서라도 만나지 않으려고 애를 쓰게 된다.
본인은 모르는 무심결 또는 저절로 그렇게 된 것 같아도 사실은 만나기 싫은 속마음이 숨어 있다.
어떤 사람이 싫어지면 그 사람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거나
그 사람을 만날 수 없는 어떤 일이 저절로 생겨나게 된다.
얼핏 보면 저절로 그런 일이 생긴 것 같지만
자세히 이유를 따지면 자기 자신이 그 사람을 싫어해서
그런 방향으로 일을 꾸려나간 것이다.

사랑한다면 마음이 있다면 자주 만나야 한다.
만나야 정이 든다.
가까운 친밀도 거리는 45.7센치미터이지만
시간적인 거리는 길어도 보름이 아닐까 한다.
교도소에 있는 사람이거나 외국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보름에 한번은 만나야 친밀한 사람 같다.
넉넉하게 잡아도 한달에 한번은 만나야 사랑하는 사람의 거리가 아닐까 한다.

까마귀 사진은 울산시 다운동에서 촬영하였음
사진을 클릭하면 큰 사진이 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