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백년 넘어 살다보니 한 해 한 해에 대한 평도 조금은 가능해 지는 것 같다. 어떤 해는 그저 그렇게 별 일 없이 지나가기도 했고, 또 어떤 해는 죽나 싶을 만큼 힘든 일들로 인해 어찌 살았는지 또 살고 있는지 누가 물을까 피해 다닌 해도 있었다. 두문불출하고 자신만의 시간에 매몰되어 세상의 세월이야 거꾸로 가든 날아가든 내 알바 아니었던 해들도 있었고, 그저 늘 오늘만 같기를 소망한 해도 있었다. 인간의 삶을 무엇이라 정의 할 수 없듯이 한 해 살이 또한 예상할 수 없는 것이 인지상정일 듯, 그렇게 보내고 또 맞으며 우리는 약속한 해를 산다.

마음이야 늘 행복하기를 소망하지만 소망이 삶이 되는 것이 어디 쉬운가? 그러기에 기원하고 또 빌고 빌어 그러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행복하세요. 복 많이 받으세요. 소원성취하세요.’ 과거 사상가들이 무한한 우주의 운행을 해와 달로 쪼개고 날과 시로 쪼개지만 않았다면 우리의 미래를 예측할 수 없음에 불안 할 수도 있겠으나 오히려 지금보다는 더 자유로울 수 있지 않았을까? 인간사 나고 살고 죽는 것에 계획이 좀 없으면 어떻고 예측이 불가 하면 어떤가. 예측한다고 뭐가 얼마나 달라질까? 계획을 세운들 그 계획의 몇%를 성취하며 산다고. 짜임세가 좀 덜하면 어떻고 불안정한 틀을 만들어 끼워 넣는 다는 것이 무슨 큰 의미란 말인가?

인간이 자신의 불안을 줄이기 위해 많은 장치들을 개발하여 그것을 ‘과학’이라 으스대며 ‘발전’이라 부축이고 ‘성장’이라며 죽기 살기로 매달려 혼신을 다해 일해 왔다. 결과는 아직 미정이며 그것들의 부작용들로 인해 예상치 못한 것들로 인간이 죽어 가고 있다. 지금 혹은 서서히 그렇게. ‘인간에게 있어 삶의 의미란 무엇인가?’

신앙인은 ‘신을 찬양하고 그의 뜻을 이루는 것’이라고 정의 할 것이고, 개인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몫을 성실히 수행하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삶은 이타적인 의미만 가치 있는 것일까? 인간은 타인을 위한 삶을 살기 위해 생명을 부여 받았나? 이러한 질문에 혹자들은 ‘이러한 과정 속에서 사랑과 행복과 성취에서 오는 만족감을 느끼면 사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할 것이다. 사실 인간 삶의 의미에 무슨 정답이 있겠는가? 그저 그것이 자기 삶의 의미로 있으면 그만일 것이다.

‘인간’이라는 ‘순수한 실체’ 하나만 놓고 본다면 인생살이는 복잡할 필요가 전혀 없다. 순수해서 단순할 수 있다면 먹고, 자고, 일하면서 생명을 살면 된다. 그런데 인간은 순수함과 단순함을 지루해 한다. 몹시도. 그래서 인간은 아주 모호하고 다소 맥락 없는 ‘사유’라는 것을 끄집어내어 무한한 우주만큼이나 무한한 이상의 세계를 펼치기 시작했다. ‘사유!’ “1.대상을 두루 생각하는 일. 2.철학 개념, 구성, 판단, 추리 따위를 행하는 인간의 이성 작용”(네이버사전) 이러한 사유의 현실화가 아닌 그저 사유만 있었다면 어땠을까? 생각에 생각 또 그 생각에 생각의 반복. 하지만 인간은 생각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생각한 것을 실재계에서 만지고 보고 이용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얻은 결과는 다양성, 편리함, 욕구충족, 생명연장 더 나아가 영생? 이러한 결과를 발전시키기 위해 인간은 끊임없이 발굴과 파괴를 반복하고 있다. 삶의 윤택함은 자연의 파괴를 전재로 한다는 사실의 위험성에 대해 직시하고 싶지 않고 들추어내고 싶지 않다. 그것을 직시하는 순간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달콤하고 매혹적이며 치명적인 매력이 있는 ‘욕망’을 충족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릇된 욕망의 끝은 파멸이라는 것을 직시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욕망은 언제나 달콤한 기대와 함께 오기 때문에 누구도 이면에 있는 파멸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사실 유한함에서 무한을 꿈꾸는 것 자체가 이미 오류임에도 불구하고 그렇다.

우리는 오늘도 또 그렇게 한 해를 산다. 자성하고 반성하고 돌아보아 겸손하고 비우고 덜어내는 것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이 한 해가 그러했듯이 또 한 해를 그렇게 살 것이고 또 살기 위해 가쁜 숨을 쉬어가며 내 달릴 것이다. 뒤를 돌아보면 안 되고 그저 앞만 보며 질주하는 것만이 살 길이라 부축일 것이다. 무엇을 위해서? 왜? 꼭 대열에 있어야 할까? 반드시 사회가 인정하는 그 어떤 것을 해야 하는 것인가? 규율과 규정과 법의 태두리 안에 있지 못하면 낙오가가 되는 것인가? 사회라는 테두리 안에서 함께 살기 힘들면 혼자 살면 되고, 혼자서도 힘들면 인간무리를 통제하기 위해 만든 사회 규범이 필요 없는 자신만의 세상이 통하는 곳으로 가면 된다. 누구도 그러면 안 된다고 말 할 수 없다. 그래서 요즘 ‘나 혼자 산다. 자연인’과 같은 프로가 인기가 있는 것이리라.

함께 하면 행복할 줄 알았다. 무리지어 살면 두려움이 줄어들고 더불어 나누면 행복이 배가 될 줄 알았다. 집단을 이루어 무엇인가를 성취하면 큰 보람이 있을 줄 알았다. 국가가 주는 거대한 힘 속에 있으면 안전과 안정은 보장 될 줄 알았다. 하지만 인간의 잘못된 욕망과 그릇된 사유가 멈출 수 없는 파괴의 길을 가고 있는 현실에서 이제 인간은 더 이상 갈 곳이 없다. 그래서 다시다. 처음부터 다시. 리셋 아니 포맷이다. 할 수만 있다면 그렇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위대성은 ‘희망’이라는 단어에서 발견된다. 삶이 아무리 힘들다 해도 그래도 인간의 ‘희망’이라는 단어 앞에서는 머뭇거린다. ‘희망’ 일말의 희망이라도 품을 수 있다면 인간은 또 걷는다. 뚜벅 뚜벅 질질 그렇게. 새해라는 희망, 미지에 대한 희망, 잘 될 것이라는 희망. 그래서 인간은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달맞이 찬바람을 가르며 함성을 지른다. 2019년에도 우리는 살아 있음에 희망한다. 그래서 또 파이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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