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아침, 나하 토마린항 여객대합실에서 아라카키 연구원을 다시 만났다. 그녀는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는지 눈가가 푸석푸석하고 머리도 약간 헝클어진 모습이었다. 매표소에서 승선 서류를 작성한 뒤 표를 끊었다. 자마미로 가는 승객 가운데는 스킨스쿠버를 즐기러 가는 외국인 다이버들이 많았다.

쾌속선 ‘퀸자마미’는 출발하자마자 경기용 모터보트처럼 무자비한 속도로 질주하며 양쪽 창문으로 물줄기를 마구 튀겨 올렸다. 아라카키는 자기 좌석을 찾아 앉자마자 캔맥주 2개를 꺼내 내게 하나를 건네고, 자신도 한 개를 따서 목안으로 주룩 쏟아부었다. 그녀는 외삼촌의 식물 노트를 다 읽느라 밤을 꼬박 새웠다고 했다.

“저는 자마미 바닷속에 스쿠버 다이빙을 하면서 어떻게 그곳에만 산호가 싱싱하게 자라고 있는지 항상 궁금했는데, 그 두 분이 산호 이식작업을 한 거더라고요... 두 분은 제게 정말 엄청난 영감을 줬어요. 스고이!”

그녀는 오른손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더니 가방에서 모자를 꺼내 푹 눌러쓰곤 그대로 잠들어버렸다. 나는 심하게 흔들리는 2층 갑판으로 올라가 오래전 외삼촌이 통통거리는 목선을 타고 밤새도록 갔다는 뱃길을 구경했다.

배가 무척 심하게 흔들리는데도 자마미 바닷속 산호초를 즐기러 왔다는 소녀 3명이 갑판에서 사진 찍기에 열중했다.

지금 이들이 찾아가는 산호초가 한때 전쟁으로 완전히 파괴되었지만, 누군가의 손에 의해 다시 회생되었다는 사실은 아무도 모를 것이다.

그동안 이 바다에서 많은 것들이 망각 속에 파묻혀버렸지 않은가. 나의 외삼촌이 자마미에서 식물조사를 하다가 우연히 발견한 보석 동굴에 관해서도 아무도 알지 못하고 있으니까. 모든 사실이 그곳에서 발견된 다이아몬드처럼 지금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사실 나는 미군과 일본 정부의 자료를 통해 그 다이아몬드에 대해 줄기차게 취재해왔다. 그 가마가 있던 터에도 가봤는데 거기에서 동굴의 흔적을 발견했으며, 미국 관계기관의 자료를 통해 그 보석의 존재도 거듭 확인했다. 결국 외삼촌이 그 보석들 때문에 죽게 됐다는 것도 확신하게 되었다.

미군은 도쿄를 점령한 이후 일본군이 자마미섬에 숨겨놓은 다이아몬드를 일본은행 지하창고에 보관했는데, 연합군사령부(GHQ)의 경제과학국(ESS)국장이던 마쿼트 소장은 약 32만 캐럿에 달하는 이 다이아몬드를 기반으로 거대한 비자금을 조성했다. 지금 일본에선 이를 ‘M자금’이라고 부른다.

마쿼트는 ‘M자금’을 바탕으로 미군 점령기간 동안 일본의 재정 금융 무역 산업을 주물렀고, 재벌해체를 선도했으며, 히로히토 일왕의 위상을 보장해주었다.

결국 자마미에서 미군이 획득한 다이아몬드는 외삼촌과 극한의 대립관계였던 ‘나카타’라는 일본 정보장교가 의도한 대로 된 셈.

최근 미국에서 공개된 문서에 따르면 미군 점령기에 일본은행 금고실의 보석 명세서가 나왔는데, 거기에 기록된 다이아몬드는 1947년 11월 28일 32만 1,366캐럿이었는데, 1950년 12월 31일 16만 1,840캐럿으로 줄었다. 그 뒤 이 다이아몬드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32만 캐럿이면 적어도 몇 조 원이 되는 돈인데 당시로선 엄청난 액수였다. 그 돈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 다이아몬드는 지금 어디에 숨어있을까?

나는 휴대폰을 꺼내 마에지마를 비롯 스쳐 지나가는 작은 모래섬과 바위섬들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었지만 배가 너무 심하게 흔들려 초점을 맞추기 어려웠다. 나하에서 출발한 퀸자마미는 55분 만에 자마미항에 도착했다.

그새 한잠 잔 아라카키는 맑은 표정으로 활짝 웃으며 빠른 걸음으로 먼저 배에서 내렸다. 그녀가 이미 전화로 연락을 해놨는지, 60대 중반으로 보이는 친척 아저씨가 항구에 마중 나와 있었다. 그녀가 그 아저씨를 소개해주자 나는 깊숙이 허리 숙여 인사했다.

아라카키의 외척인 미야자토 아저씨는 내가 부탁도 하기 전에 이 마을에서 가장 연세가 많은 할머니를 만나게 해 줄 테니 골목 슈퍼 앞에서 기다리라며 손짓하더니, 그 할머니를 모시러 가기 위해 돌담 뒤로 사라졌다.

나는 아라카키와 함께 자마미소학교로 올라가는 좁은 골목의 잡화가게 앞 하얀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그 할머니가 나타나길 기다렸다. 10분쯤 지났을까? 미야자토 아저씨 뒤로 하얀 치마를 입은 할머니가 골목 끝에서 나타나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걸어왔다. 할머니는 걸으면서 자주 멈칫거리며 지나치는 학생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눴다.

할머니는 “실례합니다!”라며 아라카키 연구원이 내주는 플라스틱 의자에 조용히 앉았다. 자리에 앉은 할머니는 그녀를 알아보고 “아이고, 에리짱, 오랜만이네... 엄마는 건강하시지?”라며 그녀의 팔을 쓰다듬었다. 곁에 서있던 미야자토 아저씨가 다가와 “할머니의 연세가 97세”라고 내게 귀띔해주었다. 아라카키가 할머니의 귀에 입을 가까이 대고 얘기했다.

“할머니. 이 분이 할머니께서 어떤 사람을 알고 계시는지 물어보려고 찾아왔어요.”

“어떤 사람...?”

“네, 할머니. '우타'라고 전쟁 때 자마미에서 간호사 하던 분 생각나세요?”

“우타?..... 우리 마을엔 '우타'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가 두 사람 있었지... 음... 간호사라면 치넨 우타를 말하는 거겠네?”

“맞아요! 치넨 우타씨! 그분은 이미 돌아가셨죠?”

“그럼! 아주 오래전 전쟁 통에 죽었지. 그때야 어디 한두 사람이 죽었어?.... 아, 마을이 온통 시체더미였는데 뭐..... 근데, 그걸 지금 알아서 뭐하누?”

“아, 네, 이분이 알고 싶어 해서요... 할머니, 그 치넨 우타라는 여자의 남편이 있었죠? 혹시 기억나세요?”

“우타 언니의 남편?....... 어!그럼... 키 큰 조선남자였지... 식물 박사라고 했었는데...?”

“맞아요. 근데 그 두 사람은 여기 자마미에서 돌아가셨어요?”

“그럼.... 저 아고노우라 건너편 마챤산에서 총을 맞고 한날한시에 죽었어...”

“누가 총을 쏜 거죠?”

“그야 모르지... 미군들은 일본군 패잔병이 쏘았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두 사람의 몸에서 나온 총알이 미군 총알이었다고도 했지.....”

“그래요? 그럼 그 두 사람의 묘지는 어디 있어요?

“어? 그 두 사람은 묘지가 없어...”

“왜요?”

“그 우타의 남편이 자기가 죽으면 뼈 가루를 자마미 섬에 뿌려달라고 자기 공책에 유언을 남겼다면서.... 미군 장교가 시신을 거둬 화장을 한 뒤 두 사람의 뼛가루를 비행기에 싣고 이 섬의 하늘에서 모두 뿌려버린 거지...... 이 섬 전체가 그 두 사람의 무덤이야....”

“자마미 사람들도 하늘에서 뼛가루를 뿌린 걸 알았나요?”

“그럼, 우리는 귀갑묘에 안장하자고 여러 번 얘기했지만, 그 미군 장교가 고집을 부려 뼛가루를 뿌려버렸으니까...” 할머니는 한참 생각에 잠겨 있다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하긴..... 그 뒤로부터 이상한 소문이 났어..... 달밤에 저기 다카스키산에 올라가면 두 사람이 뛰어놀고 있다는 거야.... 요즘까지도 그걸 본 사람들이 있어... 여기 이 사람에게 오늘 밤 저 산에 한번 올라가 보라고 해봐....”

할머니의 말씀을 듣자 나는 조바심이 나서 밤이 올 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다. 빨리 다카스키 산에 올라가 보고 싶었다. 할머니께 고맙다고 인사를 하며 준비해온 도자기 찻잔을 선물로 드렸다. 내가 지금 당장 다카스키산에 올라가보고 싶다고 하자, 아라카키 연구원은 할머니를 댁으로 모셔다 드리고 좀 쉬고 있을 테니까 혼자 다녀오라며 손을 내저었다.

“지금, 달밤도 아닌데 두 사람이 거기 나타나겠어요?”

그럼에도 나는 해발 131m인 다카스키산으로 향했다. 오솔길을 따라 진땀 흘리며 꼭대기에 있는 전망대에 올라가자 사방이 확 트였고, 짙푸른 산과 바다가 내려다보였다. 발아래 보이는 섬들의 짙은 삼림에서는 전쟁의 흔적이 사라진지 오래였다.

왼쪽에 보이는 도카시키섬, 그 너머 보이는 오키나와 본도, 앞에 보이는 아카섬, 가까이 있는 가히섬 등등..... 눈앞에 펼쳐진 모든 섬들은 눈부시고 평화로웠다.

지금 눈에 보이는 이들 오키나와 섬에는 한때 한국인 징용자 1만 5,000명이 강제로 끌려와 극심한 노역에 시달렸다.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다시 조국의 땅을 밟지 못했다. 그럼에도 일본은 여전히 이들의 명단을 공개하지 않은 채 쉬쉬하고 있다. 나의 외삼촌을 포함하여 조국 땅을 다시 밟지 못한 많은 영혼들은 이곳 산과 바다에서 바람처럼 떠돌고 있을 것이다.

이수와 우타, 두 사람이 산호 이식을 하러 다니던 가히섬 앞바다에 아까 봤던 젊은이들이 스쿠버다이빙을 하기 위해 보트에서 내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오래전 미군들이 소해작전을 펴던 곳에서 저들은 스쿠버 다이빙으로 산호를 즐기며, 일탈을 누렸다.

이때 싱그러운 바람 한 뭉치가 내 입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외삼촌처럼 그 바람을 사과 한입 베어 물듯 입 안에 넣고 씹었다. 바람이 과일처럼 아삭아삭 씹히진 않았지만, 나의 머릿속을 맑게 씻겨주었다.

산등성이를 내려다보며 이수와 우타, 그 두 사람의 영혼은 오늘도 이곳에서 나비처럼 식물들을 돌보느라 바쁠 거라고 상상하는데.... 누군가가 등 뒤에서 나의 어깨를 두드렸다. 깜짝 놀라서 뒤돌아보니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돌담무늬나비’ 두 마리가 서로 장난을 치며 바람을 타고 이치네라곶 방향으로 헤엄치듯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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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림] 새해부터는 ‘하멜펀드’라는 새 소설을 연재합니다. 이 ‘하멜펀드’는 세계적인 펀드 헤저를 1년 2개월간 밀착 취재해 쓴 경제소설입니다. 헤지펀드 매니저들의 피 튀기는 경쟁, 투자철학, 기이한 투자방법 등이 재미있게 펼쳐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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